• ‘지잡대’여 일어나라
    [기고] 역사발전의 담지자는 기득권과 거리가 먼 사람들
        2016년 11월 07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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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맞아 각 대학에서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소위 ‘지잡대’ 시국선언 관련한 글들이 SNS상에서 이목을 끌고 있다. “지잡대는 시국선언 할 자격이 없다.”는 글이 떠도는가 하면 “서울대생의 1표와 배재대생의 1표는 모두 값진 1표이고, 내 옆의 가족들의 안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면 행동해야 한다.”는 배재대생의 글이 누리꾼들의 응원을 받기도 했다.

    한국사회 저항운동은 대학생 운동이 이끌어왔고 그 중에서도 소위 명문대생들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대를 위시하여 공부 잘하는(시험 잘 본) 학생들의 선구자적 희생정신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과연 사실일까?

    1960년 4월 혁명부터 보자. 지금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지만 4월 혁명의 주역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들과 도시빈민이었다. 한국 학생운동사에 가장 큰 유명을 떨친 서울대 문리대조차 대광고 학생들이 교문을 흔들며 ‘형님들 나오세요.“ 했을 때 비로소 4월 19일 시위에 동참했다.

    대구 경북고의 2.28 시위, 마산상고 김주열의 사망에서 알 수 있듯 4월 혁명의 불꽃은 고등학생 시위였다. 고등학생들은 4.19 이전부터 이미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주축은 경기고, 서울고처럼 명문대 진학이 예비된 명문고 학생들이 아니라 실업고, 야간고 학생들이었다. 당시 중심적으로 참여한 학교는 대동상고, 선린상고, 강문고, 중동고 등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구술기록 중에서)

    4월 혁명의 경험으로만 봤을 때 학생들의 저항운동 참여는 실업.야간고교생 > 일반.명문고교생 > 대학생 순이다. 강남에서 여당 몰표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실에 대한 분노는 물적 토대에 기반을 두게 마련이고 기득권에 가까울수록 저항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대학생 운동이 나라를 바꿨다는 1980년대는 어떠할까. 1980년대 저항운동의 도덕적 상징이었던 열사들을 보자. 매년 6월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에서 합동추모하는 열사 중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자살한 대학생 열사는 김태훈, 송광영,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박혜정, 진성일, 박선영, 8명이고 이 중 송광영(경원대), 진성일(부산산업대), 박선영(서울교대), 셋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스스로 생명을 던진 저항만이 최고의 저항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후대에서는 그 죽음의 고귀함을 기려 열사로 추모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귀한 희생의 8분의 5가 서울대생이라는 것은 과연 어느 만큼 사실일까? 결론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1984년 12월 7일 전북대 철학과 김준호가 음독자살했다. 그는 전북대 이념서클인 흥사단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연)에 운영하는 야학의 국어교사로도 일했다. “고통스럽지만 의지가 있는 나는 나대로 비열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들의 간악스런 고통이 있기 전에 나는 사라져 버린다.…” 는 유서를 남긴 그는 전북대 민주동우회에서는 열사로 기리고 있으나 매년 6월 전국합동추모 대상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반면 서울대 여학생 박혜정은 “반성하지 않는 삶은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음이다. 부당하게 빼앗김을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은 죄. 부끄럽게 죽을 것.”이라는, 김준호와 비슷한 정조의 유서를 남겼으나 합동추모 명단에 포함돼 있다. 박혜정은 유서에 나타난 이 같은 자괴적 정조 때문에 사망 당시 서울대 운동권 내부에서 열사 호명을 두고 찬반이 갈렸으나 이후 합동추모 명단에 올랐다. 거꾸로 김준호와 같은 경우는 더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얼마 전 10월 28일은 건대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1274명의 학교별 인원은 다음과 같다.

    건국대 111, 서울대 180, 고려대 161, 연세대 115, 한양대 48, 서강대 88, 이화여대 83, 숙명여대 21, 시립대 69, 한신대 101, 경희대 50, 외국어대 32, 국민대 21, 덕성여대 25, 성심여대 21, 한성대 27, 성신여대 23, 장로신대 20, 상명여대 16, 감신대 15, 경기대 13, 강남사회복지대 18, 서울여대 5, 인천대 5, 전문대(여) 6.(10.28건대항쟁 20주년 기념자료집)

    서울의 대학과 경기 일부에서 참여한 건대항쟁 구속자 명단에서 특기할 점은 지방대와 신학대, 그리도 전문대의 경우 전체 재학생 수에 비해 구속자 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1987년 당시 학교별 재학생 수는 성심여대 3,558명, 한신대 2,757, 강남사회복지대 3,361명이었다. 반면 서울대, 연대, 고대는 2만명에 육박했다. 학생수와 대비하면 비명문대의 참여율이 비슷했고 물리적 거리나 조직적 관계의 접근성까지 감안하면 훨씬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만 봐도 한국 저항운동에서 명문대 신화는 일부는 허구이고 일부는 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허구와 과장은 왜 생겨났을까. 그것은 명문대 출신들이 역사의 기록자였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저항세력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에도 권력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권력은 지배세력에서와 마찬가지로 저항세력에서도 명문대 출신들이 쥐고 있었다.

    다행히 인터넷의 발달로 과거 소수에 의해 독점됐던 역사 기록이 점차 보편화하고 있다. 나의 기록을 내 스스로가 남길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부당한 권위가 나와 우리의 자리를 매기던 시절을 나와 우리의 손으로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 기록의 주체와 무관하게 이미 역사 발전의 담지자들은 기득권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4월의 혁명에서 6월의 항쟁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함성을 이끌던 사람들은 변절과 반역의 가능성을 내포한, 더 가진 한 줌의 무리가 아니었다. 덜 가지고 못 가졌기 때문에 세상을 전복하지 않고서는 희망을 꿈꾸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의 저항운동이 이분법적 정치 전선에서 여와 야의 위치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사회 곳곳에 스며든 부당한 권위와 기득권을 내몰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저항세력 깊은 곳에 기생하는 학벌의 위계부터 뒤집어야 한다. 명문대의 허구를 부수고 ‘지잡대’의 이름을 저항운동진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야 한다.

    글쓴이: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 행정학, 정치학을 차례로 전공했다.

    필자소개
    대학과 대학원에서 차례로 역사학과 행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사회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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