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부산비엔날레와 호러
    [아트살롱] 아방가르드의 아카이빙
        2016년 10월 13일 10: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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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예술잡지 <B-art> 44호에 실린 글을, 잡지의 허락을 받아 필자가 수정하여 기고한 글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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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혈≠다중≠공론장: 충돌도 화해도 못하는…….

    휴…….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라니……. 제목부터 한숨이 난다. 대단히 거창하지만, 최근 유행‘했던’ 개념들이 혼란스럽게 짜깁기 되어있다. 지구의 혼혈은 대화로 번역되든, 담론으로 번역되든, 논변으로 번역되든, 합리성과 이성적 특성을 갖는 discours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물론 다중(Multitude)으로 번역되는 개념 역시 discours라든가, 그 번역어인 공론장과도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개념들도 나름의 논리와 의미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중 개념은 정동(affect)과 가까운 개념이지, 합리적이고 이성-언어 중심적 배경을 가진 공론장 개념과 조응하기 어렵다. 이 개념들을 병치한 이유가 개념들 사이의 변증법적 충돌 효과를 낳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라는 문구로 표현되어선 안 됐다. 적어도 전시를 통해서 이를 드러내려고 했다고 변명하기엔, 전시가 너무 순진했다.

    그렇다면 전시를 기획한 감독은 개념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알지 못했거나, 그저 스타일상의 겉멋을 부려보았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공격으로 철학 전공자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 아무튼 전시 주제가 정작 개념적 잡종에 그쳤다는 냉소 정도만 날린다.

    도대체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이 전시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중-일-한의 아방가르드를 새롭게 조명하는 프로젝트인 <an / other avant – garde china-japan-korea>와 고려제강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모시켜 진행되는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전시가 열린다.

    우선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중-일-한 아방가르드 전시를 살펴보자. 프레스 오픈 당시 한-중-일 아방가르드 작품에 대한 소개와 학술대회가 있었다. 서양의 아방가르드는 흔히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페터 뷔르거의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할포스터의 네오 아방가르드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아방가르드와 중-일-한의 아방가르드는 어떤 차이를 보일까? 흥미가 일었다.

    페터 뷔르거로 대표되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삶과 분리되었던 예술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모더니즘 예술론과 대립하면서 예술을 삶 속으로 전복적으로 투여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 투여의 방식이 파격적이고 전복적이었다. 이는 전체주의적 메시지를 매끄럽게 만들던 당시의 정치적 예술에 대한 저항이라는 방법론을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는 정치를 예술화하려는 전체주의적 통치술에 반대하여, 예술을 정치화하여 그 전체주의적 통치술이 보여주는 거대 서사를 끊고 그러한 서사가 요구했던 매끄러운 이미지를 깨버리려고 하면서 일종의 ‘충격요법’을 썼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할포스터로 대표되는 네오 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충격효과가 이미 기대된 충격효과로 변해버리고, 심지어 그 충격효과가 상업 광고 등에 흡수되어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몰락한 이후, 예술 내부에서 예술의 제도와 투쟁하려는 것으로 자신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려는 제도 예술 내부의 전복적 활동을 수행한다. 물론 이 아방가르드도 결국 예술 제도가 예술로 인정함으로써 그 파격 행위가 이후 일종의 ‘작가’의 아우라나, ‘작업’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결국 네오 아방가르드의 파격도 제도 예술 내부의 승인으로 인해 그 충격효과는 제도예술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런 거친 아방가르드의 예술사를 염두에 두고, 우선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제목을 보자. <an / other avant – garde china-japan-korea>. 이는 아방가르드로 단일하게 엮이지만, 서양의 아방가르드와는 다른 중-일-한 영역만의 특색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중-일-한이 아방가르드로 단일하게 묶이더라도, 그 속에서 서로 내적으로 다른(an/other) 차이를 보이는 아방가르드를 드러낸 것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좀 더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호기심은 전시를 보면서 서서히 무너졌고, 이후 벌어진 학술 세미나는 그런 호기심에 숫제 침을 뱉었다. 내가 알던 아방가르드 개념이 틀렸거나, 이 전시의 아방가르드 개념이 틀렸거나! 내 옆의 한 기자는 나눠준 유인물의 여백에 ‘존나 모호’라고 적었다. 기사화 되지 않을 말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도대체 저들이 말하는 중-일-한의 아방가르드란 뭘까? 아방가르드를 저렇게 말한다면, 내가 알고 있던 아방가르드는 도대체 뭐였던 것일까? 근본적인 의문을 들게 한다는 점에서 이 학술대회는 참으로 아방가르딕하다. 침을 뱉었다고 했던 말을 철회라도 해야 할까? 이들 3국의 기획자들이 제공한 유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이 말하는 아방가르드를 살펴보자.

    중국

    중국의 아방가르드 작품 중에서

    #중국의 경우

    중국의 경우, 포스트 광장시대의 미술을 아방가드르로 표현한다. 포스트 광장시대(1976년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 아방가르드의 특징은 무엇일까? 아무런 답이 없다. 그렇다면 애써서 짐작하는 수밖에. 글을 보면 저항예술이 아방가르드이라는 식이다. 심지어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모더니즘 개념이 과감히 아방가르드로 입항한다. 어떤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역시 답은 제공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등장했던 예술의 정치화라는 흐름이 중국 아방가르드의 흔적인 것처럼 응답되고 있는데, 이것은 미학적 개념의 차이보다는 그저 역사적 차이 덕분에 생긴 개념적 차이다. 그렇다면 중국 아방가르드의 특징은 예술의 정치화라는 기존의 서양 아방가르드 개념을 단순히 중국 역사화 사회에 적용해서 얻어진 차이일 뿐이다. 미학적 차이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일 수밖에 없는 내용상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중국 아방가르드만의 미학적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과감히 동양의 것을 부르짖던 기백을 무색케 할 뿐 아니라, 서양의 아방가르드를 향한 부끄러운 개념적 투항이다. 결국 중국 아방가르드의 정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중국에 중국 특유의 아방가르디스트가 있었다는 선언만 나열될 뿐이었다.

    일본의 아방가르드 작품 중에서

    일본의 아방가르드 작품 중에서

    # 일본의 경우

    이제 일본으로 가자. 그나마 일본은 표현상의 일관성이 있다. 일본 전위의 역사가 ‘결핍’과 ‘패배’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일본 전위는 서양에서 유행하던 예술상품을 수입했다. 그래서 30-40년대 국가적 탄압에 전위가 순응하거나 소멸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전위 역시 ‘유럽의 전위 미술이 그러했듯’이라는 글의 수사에 등장하듯, 서양과 구별되는 전위의 특성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솔직하게 사와라기 노이는 전위라기보다는 급진주의로 또는 실험미술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정치적 저항을 중시하고 이념의 실현이 상실된 이념 부재의 급진주의가 등장한다고 언급한다. 사와라기 노이는 계속해서 전위의 정신적 배경이 ‘결여’되었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60년대 전위는 최종적으로 국가적 문화행사에 자진 투항하여 또 다른 ‘패배’를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이전의 열기가 순응과 자멸로 산화된 이후, 냉정한 전위가 등장한다는 게 사와라기 노이의 설명이다. 일본 전위에 대한 이 모든 설명이 결핍과 패배이다.

    그렇다면 일본 전위는 결핍과 패배인가? 오히려 급진적 실험미술이라고 불러야 한다면서, 전시된 작품들에 아방가르드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를 꺼리면서도 그의 아방가르드에 대한 설명은 이어진다. 계속해서 그러한 결핍과 패배를 선언하는 사와라기 노이의 최종 발언에서 아방가르드의 기준은 ‘정치적 비평성’, 다시 말해 정치적 비판의식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서양의 아방가르드보다 훨씬 더 느슨하고 순진한 퇴행 아닌가? 예술사에서 ‘비판적’이지 않았던 미술이 오히려 드물 정도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같은 작품도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일본 전위 미술의 미술사적 설명에 미학적 개념이 결핍되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 한국의 경우

    그렇다면 한국은 좀 나을까? 감히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 김찬동이 설정하는 아방가르드의 범위부터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한국의 아방가르드는 한 쪽 극에 모더니즘 연장의 단색화의 형식주의가 있고, 다른 한 쪽 극단에 민중미술의 내용주의가 있다. 아방가르드는 이 둘 사이의 어느 쪽에도 치우지지 않고 양자의 경계점에 선다고 한다. 이런 식의 어설픈 절충주의는 출발부터 아방가르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 아방가르드는 시종 실천적으로는 비판적(저항적)이고 형식적으로는 실험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방가르드는 그러니까 비판적(저항적) 실험주의다. 이러한 절충주의적 정의만큼 무비판적이고 비실험적인 게 있을까.

    심지어 왜 그러한 정의를 했는지, 그러한 정의를 한 기준이 무엇인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한국의 아방가르드가 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탈형식주의와 어느 정도의 탈내용주의를 추구해야 한국적 아방가르드라는 영토의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을까? 모호한 기준이다. 개념 정의상에도 상당한 미숙함이 보인다. 심지어 그 기본적인 어조는 이미 서양의 두 가지 아방가르드 전통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러니 그의 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국적 어법은 결국 소재주의에 그치거나, 서구적 아방가르드의 지역사적 변용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차라리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더 아방가르드적이지 않을까. 차라리 다른 개념을 추출하는 건 어떨까?

    그의 마지막 글에는 한국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아쉬운 점을 치열성의 부족으로 꼽았다. 나는 그 치열성의 결핍을 김찬동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이 치열성의 부족은 개념적 엄밀성의 부족으로 이어진다. 이 부족한 엄밀함으로 그는 “부산에 아방가르드가 없다.”고 과감히 선언해버린다. 정의되지 않은 개념적 틀로 특정 데이터를 생산해내는 과감함이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 선언 이전에 자신의 개념적 자의성과 엄밀성의 부족을 먼저 반성하기 바란다.

    이 세 전시 기획을 종합하면, 필자가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포기하라고 지적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전시 감독(윤재갑)을 겨냥한다. 감독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개념 또는 최근 팔릴 만한 개념을 마음대로 먼저 선정한 후, 세 분야의 프로젝트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 했다는 ‘혐의’가 역력했다. 차라리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벗어나서, 새로운 개념으로 세 전시를 아울렀으면 어땠을까? 적어도 실험적인 시도는 됐을 것이다. 심지어 서양의 아방가르드에 패기어린 투항을 하는 굴욕은 면했을 것이다. 아무튼 칸트를 패러디해서 세 프로젝트가 공히 보인 문제점을 종합하면 이렇다.

    “내용 없는 아방가르드는 공허하고 아방가르드 없는 내용은 맹목이다.”

    고령제강에서 전시 중인 작품

    고령제강에서 전시 중인 작품

    비엔날레-아카이빙-미술관

    아방가르드를 아카이빙하려면 어떤 형식을 갖추어야 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아카이빙에 반하는 반아카이빙의 논리를 생각하더라도, 비엔날레가 아방가르드를 내세웠을 때, 이 점을 고민해야 했다.

    아도르노는 미술관을 회칠한 무덤이라 했다. 작품의 생명에 최종 사형집행을 하는 곳이 미술관이라면, 그 중에서도 통상의 아카이빙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비엔날레가 굳이 미술관이 하는 이런 악역을 맡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방가르드 기념비 세우기? 그런데 기념비 역시 사형 선고를 내리는 효과가 있다. 아방가르드를 무덤의 공식적 부장품으로 매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어떤 것이 부장품이 된다는 것은 ‘소장(매입)할 만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아방가르드도 진공포장(상품)되어 팔릴 것인가? 이것은 기존의 아방가르드의 명줄을 잘랐던 제도 밖 상업적 권력을 미술관이 스스로 수입하는 꼴이 된다.

    그런데 기념비는 생생한 기억의 생명을 빼앗는 효과도 낸다. 예컨대 유대인에 대한 속죄를 기념물로 만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속죄와 인류를 향해 국가가 해야 할 속죄를 간단히 그 기념물에 떠넘긴다. 기념비가 이미 나와 우리의 애도와 기억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기념물조차 반기념물의 형태가 고안되는 마당에, 아방가르드를 비엔날레에서 아카이빙하려는 데 대한 일말의 형식적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왜 이런 고민을 우리는 ‘공유’조차 못했을까?

    심지어 고려제강 전시의 주제마저 ‘혼혈하는 지구’와 ‘다중지성의 공론장’인데, 그는 왜 이런 일에 공론장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전시 주제를 선택하기 전에, (그 개념의 논리적 연결의 문제를 떠나서) 먼저 공론장을 다중 지성에게 개방해야 하는 건 아닌가? 결국 전시 감독이 지구가 혼혈한다고 하면, 작가들은 그 혼혈하는 지구를 표현해야 하고, 다중지성의 공론장을 열라고 하면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나 관객은 공론장에 자동 참여한 것이 되는 것인가? 미안하지만 관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쩌면 관객이 혼혈하고 공론을 펼쳤다면, 아방가르드를 새롭게 규정했을 수도, 아니면 아방가르드를 벗어난 다른 개념으로 중-일-한의 미술을 규정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고려제강의 그 산만한 전시 역시도 제 모습을 갖추었을지 모른다.

    이번 전시는 개념만이 아니라 전시 내용을 봐도 문제의식을 촉발하는 이슈가 없다. 심지어 선언만 할 뿐 질문조차 던지지 못했다. 혼혈하는 지구는 그 어떤 충돌도 산출하지 못했고, 그 어떤 공론조차 없었기에, 그 어떤 화해도 선언하지도 못했으며,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생산적 문제형성과정도 보여주지 못했다. 부산 비엔날레라는 공론장에 참여한 다중들의 지성은 자신이 참여한 곳이 공론장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색한 아방가르드 정의, 화석화된 아카이빙, 고려제강 건물과 전시가 제공하는 단순하고 어지러운 감각적 쾌의 나열, 선언된 전시주제와의 괴리. 감독이 ‘하사한’ 공론장은 이미 공론장이 아니므로 공론장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하사된 공론장은 처음부터 ‘독단의 장’이일 뿐이다. 상황이 이런데 부산비엔날레는 도대체 학술위원회를 왜 없앴을까. 부산 비엔날레는 2014년 오광수, 권달술이 만든 케플랑 사태의 파행에서 왜 한 발짝도 나아가질 못했을까?

    전시를 모두 본 후, 술자리에서 만난 다중들과 나눈 잡담이 더 혼혈이었고, 더 공론적 또는 공통적이었다. 심지어 더 재미있었다. 재미는 늘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 생긴다. 그나마 고려제강의 전시는 전시 주제를 떠나 감각적 쾌는 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정도만으로 이 전시를 보라고 추천해줄 수는 있겠다. 그러나 감히 전시감독에게 말한다. 다중 지성의 대화, 아니 다중 지성의 공통적 기쁨을 믿으라고. 다중은 충분히 그리고 이미 혼혈하고 논쟁하고 있다고. 다중에게 강제로 공론장을 ‘하사’하지 않아도 그들은 스스로 ‘기꺼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할 줄 안다고.

    한 마디만 더 하자. 나는 비엔날레 무용론을 주장할 정도로 과격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비엔날레가 주는 가능성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부산이든 광주든 서울이든 여타 지역이든 이번처럼 벌어지는 비엔날레라면, 비엔날레는 아우슈비츠의 무젤만처럼 자동기계가 돼버리겠다. 무젤만은 좀비와 같은 상태가 된 채 익명이 돼버린 아우슈비츠의 수많은 생명들을 말한다. 한 무젤만이 죽으면 이내 새로 죽을 다른 무젤만이 나타남으로써 연쇄죽음의 고리가 채워진다. 상황은 변하지 않고, 참혹한 상황이 기계처럼 진행되고 순환되는 악마의 고리. 이러다간 비엔날레는 매회 다른 무젤만의 등장을 전시하는 타나토스의 장이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비엔날레는 적어도 공통체 속에서 혼혈하는 기쁨의 다중에겐 호러일 수밖에 없다.

    필자소개
    예술잡지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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