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지배이데올로기와 결별하라!
[비판과 비평] 스티븐 제이 굴드의『풀하우스』를 읽고 ②
    2012년 08월 08일 0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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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인간중심주의에 물들다

앞 글에서 필자는 보다 복잡하고 분화된 신체기관을 지닌 종들이 나중에 출현한 것이 진화를 진보로 보는 가장 큰 이유라는 했다. 실제로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그림들이나 대중적인 교과서에서는 진화과정을 그릴 때 선사시대의 삼엽충, 어류의 시대, 파충류의 시대, 포유류의 시대와 같이 자연사의 퍼레이드를 전시한다. 파충류의 시대 후반에 포유류가 등장하고, 포유루의 시대 후반에 영장목이 등장하고, 다시 한참 후에 호모속(인류의 조상)이 등장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명의 퍼레이드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매우 편향적인 사고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25쪽)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기각한다.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중생대를 파충류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표현이라는 점이다.

파충류가 중생대에 번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생대의 바다에는 어류가 훨씬 더 많았고, 척추동물문 전체보다 절지동물이 더 많았다. 절지동물은 다세포 생물군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중생대 때도 절지동물이 더 많았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어류가 파충류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무슨 파충류의 시대란 말인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현 시대를 포유류의 시대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도 포유류는 고작 4000종 밖에 안 된다. 그런데 전체 등록된 동물종만 약 100만종이며 그중 지상 생명체의 80%를 차지하는 것은 곤충류이다. 지상 생명체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곤충류이나 어류를 제외하고 지금을 포유류의 시대라고 일컫는 뻔뻔스러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진화의 방향이 종의 다양성과 번식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곤충류야말로 지상 생명체의 제왕이다.

우리의 시대를 포유류의 시대로 보는 것은 지나친 포유류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인 셈이다. (30쪽) 중생대를 파충류의 시대로 보거나 현시대를 포유류의 시대로 보는 관점은 보다 복잡하고 분화된 신체기관을 가진 종들을 우월하다고 보는 관념이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 관념이다.

우리는 여전히 박테리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점은 남는다. 왜 복잡하고 분화된 종은 진화의 나무에서 나중에 출현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보다 복잡한 종이 나중에 출현했기 때문에 진화가 마치 생물종의 진보를 나타내는 듯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진화는 한쪽 방향이 닫혀져 있다는 점이다. 진화가 가장 단순한 원핵생물인 박테리아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진화의 방향은 한쪽만으로 이뤄진 것이다.

왜냐하면 박테리아는 세포내 기관이 분화되지 않은 원핵생물인데 진화는 결코 원핵생물보다 더 단순한 생명체로 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원핵생물이 진핵생물로 변이되고,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진화란 방향성이 없는 변이를 나타내지만 변화가 나타나면 그것은 원핵생물 내에서 변하거나 더 복잡한 종으로 분화될 수밖에 없다. 원핵생물에서 비핵 생명체로 변할 수는 없으므로.(226쪽)

예컨대 단세포 생명체의 진화는 단세포 내부에서 분화하던가 아니면 다세포로 변이 되겠지만 이것이 세포가 없는 쪽으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연히 변이가 나타났다면 단세포 내에서 새로운 종이 출현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다세포 생명체가 출현하는 것이다. 단세포 생명체의 자손 중 다세포 생명체가 나왔다고 해서 모든 단세포 생명체가 다세포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단세포 생명체는 그대로 유지되고 그로부터 분리된 다세포 생명체는 다시 자신의 진화의 역사를 써 가는 것이다.

어류가 지상동물로 진화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어류 중 일부가 살고 있던 곳의 물이 말라버려 메마른 땅에 적응하도록 진화했다면 그 종들은 지상의 척추동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데본기의 혁명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류가 생명의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새로운 종, 그러니까 육지의 척추동물문이 생성되었다고 해서 어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어류는 어류대로 진화 즉 종 분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대에 파충류가 지상에 새롭게 등장했다고 해서 이들이 생명의 세계를 대표하는 종이 되는 것은 아니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종들이 하나 둘 씩 증가하며 생명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새로운 종은 계속 출현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들 중에서 어떤 종들은 현존하는 종들보다 더 분화된 종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더 복잡하고 분화된 종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과 같은 고도로 복잡한 종이 새롭게 출현하기 때문에 생명계 전체의 평균은 점차 고등화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평균으로 따졌을 때 그렇지 실제 이 평균값은 대표값이 되지는 못한다.(237쪽)

왜냐하면 생명계 전체에서 보자면 가장 단순한 생명체인 박테리아는 여전이 개체수와 종의 다양성에서 다른 종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전체 생명계(이것을 풀하우스라고 하자)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종은 생명의 나무 전체에서 아주 미미한 잔가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250쪽) 비록 새롭고 복잡한 종이 출현했지만 현존하는 종들은 여전히 번식하고 더 많은 개체수를 갖고 있다면 생명의 나무에서 이들 종은 여전히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퍼레이드에서 그려지는 진화의 단계는 역사를 잘못 써도 한참 잘못 쓴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생명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성공한 종은 최초의 생명체인 박테리아이다. 박테리아가 지상에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35억년 전이고, 그 이후 17억년 동안 오로지 박테리아만 지구 내에 홀로 존재하는 생명체였다. 박테리아의 생명력은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박테리아 등장이후 18억년 후에야 진핵생물과 다세포 생명체가 출현한다. 이 때 등장한 다세포 생명체도 동물은 아니다. 동물, 식물이라고 분류되는 것들은 생명계 내에서 아주 작은 잔가지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다세포 동물이 출현한 화석 흔적은 약 5억 8천 만 년 전의 것이다.(244쪽)

지금까지 수많은 대진화와 소진화, 멸종이 있었지만 박테리아는 그 모든 상황에서 가장 활발하게 개체수를 늘려 왔다. 지구 전체의 생물량, 그러니까 지상과 지하에 있는 모든 생물량에서 박테리아가 차지하는 량은 나무의 그것을 능가한다. 지구 전체에 존재하는 나무의 생물량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의 생물량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신체도 10% 이상이 박테리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자.(262쪽) 진화론적으로 말해, 박테리아는 번식과 개체수의 측면에서 가장 성공한 종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박테리아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진화론

앞에서도 보았듯이 진화론에 대한 통념 가운데 하나는 인간을 진화의 정점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문자를 쓰고 과거를 사고하며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종이자 동물과는 다른 ‘문명/문화’를 이룬 종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스스로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다윈과 '종의 기원'

호모라고 이름 붙여진 속이 출현한 것이 고작 150만년 정도 밖에 안 되고, 그 조상을 루시라고 해도(오스트랄로피테쿠스: 걸어 다니는 원인) 고작 300만년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나중에 출현한 종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300백 만년은 지질학적 시간에서 보면 해변 가의 한 줌의 모래알 정도 된다. 인간 종은 지질연대의 가장 끝에 등장한 종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스스로 진화의 정점에 서 있으며, 진화란 마치 인간종의 출현을 위한 장구한 역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인간이 진화의 ‘사다리 나무’의 맨 꼭대기에 고고히 서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호모속의 등장, 혹은 영장류의 등장은 진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잔가지에 불가하고, 1억년 이전으로 돌아가서 진화의 역사가 다시 쓰여 진다면 호모속이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호모속의 출연은 자연사의 아찔한 우발성이 낳은 결과이지 어떤 필연성도 없는 과정인 것이다.

‘진화의 사다리 나무’라는 말도 진화론과는 상관없듯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거나 진화가 인간 종의 출현을 향한 장대한 과정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맨 나중에 만든 후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너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쓰고 있는 창세기의 버전이 진화론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것과 같다. 이런 통념은 ‘최악의 인간중심주의’로 오염된 진화론인 셈이다.

다윈은 진화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화’를 ‘진보’로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화’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매우 꺼려했다. 진화라면 말 뜻 그대로 ‘무엇인가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라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에 이는 진화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당연히 [종의 기원]에는 진화란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진화라는 말은 허버트 스펜서라는 사회학자가 제안하여 사용된 것이며, 토마스 헉슬리를 비롯한 다수의 ‘다윈주의자들’은 이 말을 통해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발명한 내용을 설명하고자 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진화’라는 단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미 계몽된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어서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받아들였을 뿐이다. [종의 기원]이 나온 지 20년이 지나서야 다윈은 ‘진화’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다.(190쪽)

그렇다면 왜 다윈주의자들은 진화를 진보로 받아들인 것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19세기 영국이 ‘진보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해외 팽창을 통해 영국을 비롯한 서구제국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서구인들은 비서구 사회를 접하고선 자신들이야말로 진보의 정점에 서 있다고 판단했으며, 다른 미개 문명들은 자신들과 다른 역사시대를 사는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자신들은 ‘진보’의 정점에 서 있고, 다른 집단들은 ‘서구를 향한 문명화’의 길에 있다고 본 것이다.

19세기 진보주의자들에게 서구중심주의를 증명해 주는 가장 강력한 과학적 증거가 바로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그들은 자연선택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으로 이해했고, 자연의 질서를 통해 인간 사회의 지배/피지배, 약육강식을 정당화했다. 스펜서식으로 이해한 진화론은 자본주의적 경쟁과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함에 있어 더 없이 좋은 ‘과학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문제는 19세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구인들만이 진화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진화를 설명하는 다수의 교과서들조차 ‘진보의 이데올로기’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있다거나 현시대가 포유류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 모두 진화를 진보로 보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편견이야말로 말의 진화를 단선적이고, 개량적인 진보로 그리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진화론의 함의

앞에서도 보았듯이, 진화란 방향을 갖지 않는 변이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변이가 끊임 없이 생성된다는 것은 자연에서 끊임없는 종 분화가 이뤄진다는 것을 말한다. 진화란 다름 아니라 종의 다양성과 공존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화론이 여지없이 증명한 것은 인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어쩌다가 지구상에 출현한 종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만물의 영장도 아니고 다른 종들보다 더 우월한 종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무성한 진화의 나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잔가지일 뿐이다.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사고야말로 진화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최악의 종’일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같은 종의 동료들을 절멸시킬 수 있는 놀이기구(핵무기다!)를 갖고 쏠까말까 맞출까 말까 놀이하는 종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호모속은 뻔히 자신의 종의 위기(지구 온난화다!)를 예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만족을 위해 미래의 위기에 등을 돌리는 종이기도 하다. 자연사적 과정에서 보자면 인간 종의 멸종은 아무런 대단한 사건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그저 고만고만한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렇듯 진화론은 인간이란 다양한 종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들이 자각하고 자연의 다양성을 지키고, 종간의 상호 존중하는 삶이 더 아름다운 삶임을 보이고자 한다. 진화론은 어쩌면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갖도록 하고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좀 과도한 생각일지는 모르나, 스티븐 제이 굴드가 [풀 하우스]를 쓴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이런 함의라는 것만은 기억해 두자.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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