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렉싯(Brexit)의 뿌리:
    유럽적인 것과 영국적인 것
    영국 투표, 유로존 프로젝트의 실패 분명히 드러내
        2016년 10월 15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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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연합 탈퇴로 최종 귀결된 영국 브렉싯 국민투표의 의미와 그 배경에 대한 남종석 씨의 분석 글이다. 탈퇴 지지자들이 극우파의 인종주의 선동에 이끌린 퇴행적 결과라는 분석에 필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유럽연합(EU)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적 통합 프로그램의 모순과 문제점들이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시각이다. 유럽연합이라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각종 갈등과 이슈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누가 피해와 고통을 전담하고 있는지를 살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주문한다. 그래야 화려하고 아름답고 그럴싸한 말과 정책에 현혹되지 않고 누가 진정 민중을 대변하고 대표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소 긴 논문 성격의 글이지만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전재한다. 레디앙은 앞으로 논문 성격을 글도 자주 게재할 예정이다. 지금 진보진영은 연구와 분석의 과잉이 아니라 그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글은 부산에서 발행되는 문예비평지  <오늘의 문예비평> Vol 103(2016, 겨울)에도 실렸다. 편집부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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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로나르시시즘(Euro Nascissism)?

    지난 6월 23일 유럽공동체(EU) 탈퇴 여부에 관한 영국 국민투표에서 탈퇴진영(The Leave)은 52% 대 48%로 잔류진영(The Remain)에 승리했다. 영국 주류언론들은 이 결과에 대해 놀라움과 당혹감, 절망감이 겹쳐지는 반응을 보였다. 『파이낸셜타임즈』의 경제 전문기자 마틴 울프(Martin Woolf)는, 탈퇴진영의 승리를 두고, “전후 영국 역사에서 가장 퇴행적인 결정을 한 날”이라고 썼다.

    진보적인 언론 『가디언』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이자 역사학자인 티모시 가튼 아쉬는, 브렉싯은 “국제 협력, 자유주의적 질서, 개방사회의 이상에 대한 거부”이자 “영국인 유럽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삶에서 가장 큰 패배를 안겨준 투표”였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블로거는 “외국인-이민자들을 합법적으로 사냥할 수 있도록 승인한 투표”였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여주었다.(1)

    1

    영국 국민투표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도 놀라운 것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들에서의 정세분석은, 브렉싯이 금융시장 및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데 분주했다. 이들 연구기관들은 브렉싯 자체가 글로벌 금융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진단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했다.

    왜 영국인들은 브렉싯을 지지했는가도 언론사들의 주된 화두이기도 했다. 브렉싯은 세계화와 노동시장 개방으로 인해 일자리가 불안정해진 영국인들(british loser)의 저항의 몸짓이자 인종주의를 선동하는 극우파 정당 영국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t Party)의 선전에 놀아난 절망한 노동자계급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브렉싯에 대한 한국의 반응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좀처럼 대외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던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유독 브렉싯에 대해서만은 큰 관심을 둔다는 점이다. 한국 진보진영에서 갑자기 국제주의와 코스폴리탄적인 시민성이 발흥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주류 언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브렉싯은 영국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도 불행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유럽 금융 중심지로서 영국의 지위는 약화될 것이고, 영국에 유입된 이민자들의 지위가 약화되는 만큼이나 유럽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나간 영국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상실할 것이기에 영국인들은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런 (한국 진보진영 주류의) 반응은 영국 주류 언론이나 IMF, OECD의 전망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공동체에 남는 것이 국제주의, 보편적 인권의 실천, 이민자에 관대한 문화, 공동 번영의 정신에 맞는 것인데, 영국이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유럽공동체가 문명의 주체이자 진보의 표상이고, 코스모폴리탄니즘의 실천 장소라는 사고방식과 연결된다. 유럽규약은 인권의 공동체를 실현하며 공통된 번영을 위한 새로운 길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페리앤더슨은 이런 사고방식을 ‘유로나르시시즘’이라고 비판한다.(2)

    유럽은 현재 전례 없는 민주주의의 후퇴, 금융과두제의 지배, 국가 간 격차 심화,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 등으로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데 반하여 EU는 문명적 진보를 표상하는 것처럼 스스로 거만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페리 앤더슨의 입장에 동의한다. 브렉싯은 EU 체제의 모순, 영국 권력블럭과 EU와의 수십 년간의 관계, 영국 내에서 응축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브렉싯을 단순히 극우정당의 반이민 선동에 놀아난 영국 노동계급의 분노의 투표라거나 그 경제적 효과가 무엇인가로 논의를 집중하는 것은, 이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논리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브렉싯의 배경에는 EU 프로젝트의 실패라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함을 보이고자 한다. 더불어 영국과 EU관계의 역사적 맥락, 영국 자본주의의 현실이 대중들의 투표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일 것이다. 필자는 브렉싯의 미래를 단정할 수 없지만, 이 투표가 현존하는 유로체제와 신자유주의 영국에 대한 심대한 경고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2. 유럽공동체를 향하여

    유럽연합은 깊은 병이 들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유럽공동체에서의 경제적 의사결정은 소수의 정치엘리트 내에서 이루어지며, EU 내에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3)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와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를 주도하는 정치엘리트들은 금융권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초국가적인 위치에서 유럽 인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책 결정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대중들은 EU에서 자신의 참정권이 심각하게 훼손당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회의주의’(Euroscepticism)를 극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이런 대중들의 불만은 회원국들 내부에서 인종주의, 배외주의를 주장하는 극우파가 정치적 생명력을 얻는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EU의 이와 같은 운명은 이 연합이 만들어져 온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럽공동체가 만들어진 직접적인 배경에는 냉전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시 미 국무부는 유럽을 경제적으로 재건함으로써 공산주의 블록에 맞서고자 했다. 미 국무장관 에치슨은 독일과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화해-통합을 통해 대륙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초기 유럽공동체 형성의 배경에는 유럽이 낡은 대륙(old continent)이라는 이미지를 씻고, 경제적으로 미-소와 견주는 제3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유럽 정치엘리트들의 욕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후 유럽 경제는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 있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기 어려웠고, 미국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현저하게 낮았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유럽 대륙은 구식민제국의 지위로부터 추락하여 미국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종속된 상황이었다.

    1956년 수에즈 침공 당시 미국의 반대로 굴욕적으로 군대를 철수해야 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경험은, 1957년 로마조약(The Treaty of Rome)을 체결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유럽공동체의 모태가 된 로마조약은 6개국이 참여하고 있었다. 초기 유럽공동체가 지향했던 바는 독일의 경제적 힘과 프랑스의 정치‧군사‧외교적 힘에 토대를 둔 ‘연방제적 질서’였다. 그것은 평화와 공동번영, 경제적 성장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산물이었다.(4)

    이 시기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은 배제된다. 1963년 선거에서 승리한 노동당의 윌슨 행정부는 유럽 경제공동체에 참여하고자 했지만 이는 드골의 강한 거부로 실현될 수 없었다. 드골은 영국이 유럽대륙과의 관계보다 언제나 앵글로아메리카 동맹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국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유럽대륙에 실현하는 국가로서 트로이목마와 같은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공동체에 영국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유럽연합

    유럽연합 본부 건물

    유럽공동체가 단일통화 구상으로 변모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였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해 세계경제는 달러본위제로 변모한다. 달러본위제 하에서 미국은 세계경제의 통화 공급 주체로서 발권이익을 누릴 수 있는 독보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달러본위제 하에서 변동환율제가 채택되면서 환율 불안정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민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와 같은 변동으로부터 자유롭다. 달러가 세계경제의 ‘본원통화’이기 때문이다.

    드골은 세계 통화의 무질서로부터 유럽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단일 화폐가 필요함을 제기했다. 통합된 경제권과 단일통화를 통해 달러체계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일통화 구상을 구체화한 것이 베르너 플랜(Werner Plan)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재정통합에 기반을 둔 통화통합을 통해 유럽이 미국에 맞선다는 것이다. 유럽 단일화폐가 환율 불안정성에 벗어나 달러와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프랑스는 더 이상 영국의 경제공동체 가입에 대한 반대하지 않는다. 영국의 발전된 금융체계가 단일화폐의 운영에 필요한 금융적 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판단의 배경에는 1976년 런던 금융가 City가 뉴욕으로부터 금융헤게모니를 쟁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융 빅뱅을 주도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1980년 집권한 대처는 금융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복지지출을 삭감함으로써 이와 같은 변화를 급진화한다. 전후 케인즈가 구상했던 금융억압에 반하여 금융 부분을 해방시키는 혁신적인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1980년 미국 월스트리트도 같은 방향으로 변모한다. 금융주도적인 세계경제가 열린 것이다.

    더불어 유럽공동체는 경제정책에서도 대처리즘의 영향 하에서 통화가치의 안정을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설정한다. 뿐만 아니라 단일통화의 기초로 구상되었던 재정통합은 부정된다. 원래 유럽공동체는 연방제적 국가 위에 경제통합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1980년 이후 유럽공동체 내에서 통화주의가 확대되면서 그와 같은 정치적 구상은 배제된 것이다. 정치통합 없는 경제통합을 지향한 것이다. 1986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주도한 ‘단일 유럽 의정서’(Single European Act)는 그 정점이 된다. 이 의정서는 노동권을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장식용에 불과했다.

    1980년대 남유럽 국가들에서 독재정권들이 권좌에서 물러난다.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등 수십 년간 군부독재가 집권했던 국가들이 민주화되며 유럽공동체의 회원국이 된다. 유럽경제공동체가 포괄하는 지리적 범위가 확대되고 인구 규모가 커졌다. 남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에서 집권한 중도좌파 정당들이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주도한다. 중도좌파가 경제공동체의 정치적 힘으로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이 유럽공동체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남유럽 중도좌파 정당들(포르투갈 ‘포르투갈 사회주의자 당’ Portuguese Socialists, 그리스의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PASOK, 스페인 사회노동자당 PSOE)이 결합하면서 유럽공동체는 좌우 중도파라는 정치적 토대위에 서게 된 것이다. 80년대 후반 키녹이 이끌던 노동당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지지한다.

    이 시기 유럽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에는 낙관주의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대중의 지지도 최고조에 달했다. 유럽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에서 마지막 질적 도약은 80년 후반 동구권의 몰락이었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후 유럽공동체는 구 코메콘 국가들 대부분을 포괄한다. 유럽공동체의 인구는 5억에 다다르며, 지리적 범위도 지중해-발칸반도에서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에 이른다. 터키의 유럽공동체 가입은 그 마지막 판본이 될 것이다. 터키가 유럽공동체-나토의 범위를 서아시아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더불어 경제공동체 내부의 국가 간 위계질서도 체계화된다. 경제적 위상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상도 비약적으로 증가된 독일과 그 하위 파트너 프랑스, 영국 등이 유럽의 중심부였다. 남유럽 국가들이나 유럽의 소국들이 반주변을 형성했으며, 새롭게 가입한 동유럽 국가들이 주변부가 되었다.

    3. 신자유주의적-군사적 유럽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로 통화통합은 완성되었다. 국부본위제(관리통화제) 하에서 통화의 가치의 토대는 국부이자 조세기반이다. EU는 정치통합을 배제했기 때문에 ‘단일한 통화주권’과 조세기반이 부재하다. 통화가치의 안정은 유럽중앙은행의 수량조절과 회원국들의 재정안정이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각국의 화폐는 마르크화에 연동하여 평가절상을 해야만 했다. 통화통합의 최대 수혜자는 독일이어다. 독일은 우월한 제조업 경쟁력에 더해 자국 통화가 지속적으로 평가절하 함으로써 대외적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대외경쟁력을 위해 노동의 평가절하를 더 가속시켜야만 했다.

    마스트리히트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 당시의 모습

    1998년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은 모든 유로존 국가들에게 긴축재정을 하도록 강제했다. 이 조약에 따라 회원국 정부는 재정적자를 GDP 3% 이내로 한정되어야 했으며, 정부 부채는 GDP 60%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이 규정을 어긴 국가에 대해 회원국들은 경제보복 조치를 할 수 있었다. 경제공동체의 약한 고리를 형성했던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재정준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지만 정작 독일, 프랑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적용되었다. 회원국들 간 권력의 비대칭성은 유로존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안정성장협약은 유럽위원회가 결정한 것으로 회원국 의회의 승인 없이 강제되었다. 하버마스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정치엘리트의 위원회 독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단일통화체제 하에서 회원국 정부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재정정책도, 화폐정책도 할 수 없었다. 유일한 경제성장 정책은 ‘내부적 평가절하’ 즉 노동비용의 감소였다.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독일 영국 등 중심부 국가들은 복지 축소, 노동계약 유연화를 통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려 했고, 동유럽 국가들은 현저히 낮은 임금, 환경 기준 완화로 대응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 그리스 등 유럽의 반주변 국가들은 중심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자본으로 버블경제로 잠깐의 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로존 국가들은 200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실업률이 10% 이하로 하락하지 않았다. 재정준칙이 적용된 2000년대 이후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은 3% 이하를 맴돌았다. 대중들의 불만으로 가득 찼고, 민주주의는 훼손당했으며, 분노의 정치가 유럽 정치지형을 변모시키기 시작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유럽의 위기를 더 심화시켰다. 아일랜드, 그리스, 아이슬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의 재정은 단계적으로 붕괴되었으며,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었다. 유럽중앙은행의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는 독일은 경제위기를 겪는 국가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징벌적 구제금융 정책을 단행했다. 그리스가 희생양이 되었다. 구제금융을 제공하되 혹독한 긴축재정을 조건으로 했으며, 임금 삭감, 복지축소를 강제했다. 그리스는 국자 체계 전체가 무너지고, 알짜배기 국유자산은 대부분 매각절차에 들어갔다.

    강화된 재정규약은 중심부 국가들의 위기조차 심화시켰다. 2012년 유럽위원회가 도입한 재정긴축 협약(The Fiscal Compact) 따르면, 회원국들은 재정안정협약의 내용을 자국에서 법제화하고, 1998년 체결된 안정성장혁약(Stability and Growth Pact) 틀 내에서 부채 규모의 변동을 매우 작게 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했다. 그 결과 회원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긴축재정밖에 없었다. 이는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격고 있는 국가들의 경제를 더 침체시켰다. 2008년 이후 EU 회원국들의 평균성장률은 마이너스이거나 0점대에 머물렀다. 물가상승률도 0%대이다. 디플레이션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럽정치공동체 내에서 긴축은 신조(credo)’이다. 이것은 경제학이 아니다.(5)

    그렇다면 EU는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인가? EU의 군사기구 나토를 보자. EU의 확대 과정은 나토의 작전범위가 확대되는 것과 평행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이 독일통합을 승인하는 조건은 나토의 확장이었다. 동유럽 붕괴 이후 이들 국가들은 대부분 나토 관할권 안으로 유입된다. 그 이후 터키가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면, 나토의 관할구역은 서아시아로 확대된다. 터키의 유럽공동체 가입 자체가 나토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토는 서아시아-동유럽-북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는 군사적 갈등의 거의 모든 원인으로 작용하며, 전쟁기계로서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나토

    1995년 나토의 유고 폭격 당시 모습

    나토식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는 1995년 유고 폭격이었다. 유고 내전 개입을 통해 미국과 독일은 나토의 범위를 발칸 반도로 연장했다. 평화적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코소보 사태는, 나토 폭격 이후 인종 학살로 변모한다. 리비아에서의 카다피 제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갈등, 시리아-레바논에서의 확전도 모두 나토 개입의 산물이다.

    최근 유럽에서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른 난민 수용 문제는 시리아 내전에서 비롯된 것이며, 난민은 나토의 개입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EU는 터키에 난민캠프를 설치하고 유럽으로의 난민 유입을 통제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기만적인 해결책은 지중해 연안에서 계속되는 난민보트의 난파로 이어졌으며, 난민 유입은 유럽 전역에서 정치적 소용돌이를 이끌어 내고 있는 상황이다. 시리아 내전을 확전시킴으로써 난민캠프를 만든 것은 EU의 중도좌우파 정당들이고, 이 난민들로 인해 유럽은 극우파들이 준동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4. 영국적인 것의 특수성

    전후 영국 지배계급과 구식민주의자들의 심성구조에는 ‘제국의 영광’에 대한 의식이 과하게 남아 있었다. 세계경영에 대한 향수는 영국 지배계급, 특히 토리 엘리트들의 심성을 규정했다. 그러나 전후 영국 정치의 국제적 위상, 경제적 지위는 구제국의 그것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낮아졌다. 이는 영국 보수당 내부에서 두 가지 경향을 만들어 내었다. 하나는 약화된 영국의 지위를 인정하고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하위 주체로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협력하는 것이다. 영국의 현대화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주장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영국이 비록 더 이상 제국은 아닐지라도 독자적인 핵무장력,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대서양 동맹의 주체로서 독자적인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흐름이다. 비록 미국 주도하의 세계 질서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지는 못하더라도 유럽공동체의 일개 회원국으로 남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6) 그 결과 토리의 역사는 유럽공동체와 언제나 애증의 관계였다.

    노동당의 경우 역사적 국면에 따라 유럽공동체 가입에 대한 의견은 바뀌었다. 1963년 총선 승리로 12년간의 보수당 정권을 끝장낸 윌슨 행정부는 영국의 EU 가입에 적극적이었다. 윌슨(Harold Wilson) 행정부는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국가를 현대화 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럽공동체 가입은 중요했다. 단일시장으로의 접근은 영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보수당 히스(Edward Heath) 행정부가 EU 가입에 적극적으로 임했을 당시에 노동당은 전투적 노조들과 동맹하여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영국 노총(TUC)은 히스 정부가 추진했던 인플레이션, 임금통제에 맞서면서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EU 가입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노동당의 정책은 그 자체로 반 EU 정서를 드러내기보다 보수당 정부에 대한 반대로서 EU 가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 통치 엘리트들이 EU 가입을 선호하게 된 배경에는 유로달러 시장의 형성이 크게 작용했다. 유로달러 시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계기는 오일달러의 환류이다. 1차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은 석유 수출로 엄청난 달러를 벌어들인다. 아랍의 왕조정권들은 이 달러를 미국 은행보다 금융규제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럽 역외금융센터 등에 예치한다. 이를 오일달러의 환류라고 한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후 변동환율제가 확대되면서 환 투자가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영국의 금융기업들은 중동으로부터 유입된 달러를 자국의 금융시장 성장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이는 2절에서 언급했던 영국 금융빅뱅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금융의 탈규제, 자본이동의 자유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폐지 등 영국 CITY는 금융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금융혁신을 주도했다. 더불어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한다면, 유럽 금융시장의 낙후성을 감안했을 때 영국 금융의 기회는 그만큼 확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처 정부는 EU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록 금융헤게모니 확대를 위해 EU 가입이 필요하지만 영국으로서는 로마조약, 단일유럽의정서 등 이미 결정된 유럽공동체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이 규약들은 대륙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 초기 경제공동체를 주도한 국가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영국의 이익을 이들 규약 속에서 실현할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영국으로서는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국 보수당에 남아 있던 ‘제국적 심성’의 찌꺼기들로 인해 쉽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처의 영국은 노조 파괴, 탈규제, 복지 축소, 시장근본주의로 무장한 점에서 신자유주의적인 EU를 예견하는 것이었지만, 공동체 내에서 영국의 독자적 영향력, 영국적 가치의 실현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90년 통화통합의 타임테이블이 완성되었을 때, 대처는 유럽 정상들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EU가 ‘연방제적 국가’가 됨으로써 영국의 자율권은 침해했다고 회원국의 다른 정치지도자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영국이 속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처 정부 하에서 외교장관을 지냈던 조프리 호우(Geoffery Howe)는 대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영국이 지난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여 스스로 유럽 국가들로부터 분리를 추구한다면, 이는 영국의 미래를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처의 태도는 영국의 국익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것이다. 몇 주 후 대처는 다우닝가를 떠난다.(7) 이 상황이 보여주는 바는 보수당 내에서 EU 가입 여부는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은 경제공동체에 남되 통화통합에는 동참하지 않는다. 영국은 재정규약, 노동이동성 보장, 자본이동의 자유화 등 유럽 경제공동체의 일반적 규약에 복종하되 독립통화를 고수한 것이다. 영국이 독립통화를 고수한 이유는 유럽시장에서의 자본이동성의 자유를 향유하면서도 금융 중심지로서의 자율적인 화폐정책, 환시장 개입을 통한 금융 지대의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당 내에서 경제공동체 가입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1970년대 노동당의 EU 가입 반대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 1980년 중반 좌파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한 당수 키녹은, 좌파와 결별하고 노동당 현대화를 시도하면서 EU 가입에 대해서도 지지를 표명한다. 키녹은 전투적 노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블레어가 나올 수 있는 길을 닦았다. 80년대 일시적으로 흥했던 당내 좌파는 다시 주변화 되었다.

    키녹을 이은 블레어는 노동당의 현대화를 완성하면서 EU에 열정적으로 헌신한다. 블레어와 그 추종자들은 당내 의사결정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의회노동당(원내 정당)을 당원이 아닌 유권자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변모시켰다. 더불어 블레어 정부는 영국의 금융헤게모니 강화를 위해 대처의 개혁을 가속화 한다. 블레어는 ‘제국적 심성구조’를 벗은 대처였다. 그는 구제국의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세계화의 마인드를 지닌 새로운 영국을 만든다. 블레어는 노동당 현대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영국의 현대화를 지향한 것이다.

    노동당은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제화된 영국 지식산업의 부양자가 됨으로써 새로운 계급적 지반 위에 선다. 노동당의 주요 지지층은 노동자계급에게서 중간계급으로 변모했다. 노동당의 구호는 ‘이제 모두는 중간계급이다’였다.(8) 노동당이 노동자가 없는 당이 된 것이다. 거대 노조의 지도부는 보수당의 집권보다는 노동당이 집권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마지못해 노동당에 계속 남았지만 일반 노조원들의 당으로부터의 이탈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수당 정부이든 노동당 정부든 EU에서 진행된 연속적인 협정이 어떻게 영국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블레어 하에서 영국 노동당 내부에서는 EU의 정책에 이견이 없었으며, 논쟁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대중들은 EU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저 EU에서 결정된 정책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적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2006년 보수당 지도부로 선출된 카메론(David Cameron)은, 블레어를 충실히 계승하여, 보수당의 현대화를 추진한다.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층과의 유대를 강화시키거나 당 대회의 이견을 조율하기보다 일반 유권자들에 책임지는 정당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카메론은 2010년 집권 이후 소수파 정부가 되길 거부하고 자유당과 연정을 주도하면서 당내 우파들을 배제했다. 더불어 당내 의사결정권한을 소수의 지도부 내로 압축한다. 이는 지역 보수당 당원들로 하여금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이 불만은 2010년 영국독립당이라는 극우파 정당이 출현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5. 영국 노동계급(labour class), 보조금 사기꾼으로 전락하다!

    같은 시기 영국 내부에서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나를 보자. 대처 집권 이후 영국은 극적으로 탈산업화 되었다. 조선 산업, 광업, 자동차 산업, 철강 산업 등 영국의 전통 산업들은 경쟁력 부재, 혁신의 지체, 강한 파운드 전략을 인해 체계적으로 붕괴되었다. 대처 정부는 영국의 금융헤게모니 확보를 위해 파운드화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였다. 달러나 유로에 비하여 고파운드 정책을 고수한 것이다. 이는 영국 산업의 붕괴로 이어졌다.

    기술적 경쟁력이 높지 않은 영국 제조업의 현실에서 고파운드 전략은 국제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파운드의 가치를 안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인해 이자율은 여타 주변국들보다 높았으며, 이는 영국 기업들의 이자 부담을 높였다. 대처는 노동조합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노동조합이 소속된 사업장마저 시장에서 퇴출시켰던 것이다. 대처 집권기 10년간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을 꾸준히 유지했다.

    제조업의 붕괴 이후 영국 산업은 금융 및 지식산업과 같은 지식-생산자 서비스 산업과 소비자 서비스 산업으로 분화된다. 금융, 경영 컨설턴트, 영어 및 미디어 산업과 같은 국제적인 섹터가 존재하는 반면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소비자 서비스업이 융성한다. 한편에서는 엘리트 대학을 나온 지식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텔레마케터 쇼핑몰 판매원, 청소 노동자 등 저임금 노동시장이 확대되었다. 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자에 비해 월등히 높다.

    런던이나 맨체스터의 중심가들은 화려한 쇼핑몰과 현대적인 건물들이 21세기를 표상하는 반면, 구 산업지역에서는 빈곤이 축적되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은 잉글랜드 북부의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지들이다. 산업이 붕괴된 지역에서 남성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으며, 새롭게 제공된 일자리는 저임금 소비자 서비스 업종의 일자리였다.

    뿐만 아니라 실업자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남성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실업수당을 받아먹는 무책임한 도둑으로 취급되었다. 실업급여 앞에 줄을 선 노동자들은 국가의 재정을 축내는 ‘보조금 사기꾼’이었다. 1993년 메이저 총리는 보조금 사기꾼을 가려내기 위해 ‘보조금 핫라인’을 설치했다. 공짜로 실업급여를 받거나 아동수당을 부당하게 받는 이를 신고하는 제도이다.

    블레어의 노동당이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블레어는 금융자본의 수장들을 기업가 정신이 탁월한 영국의 자랑거리로 치켜세웠다. 블레어의 선거구호는 ‘시기의 정치(politics of envy)를 위한 시간은 없다’였다. 노동자들이 부자들을 시기할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일자리를 구해 스스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당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보다는 “최악의 빈곤을 척결”하는 것을 복지 정책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이를 잔여복지모델이라고 한다. 블레어는 빈곤층의 삶에는 “빈곤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청년들을 도심으로부터 몰아내었다.(9)

    노동시장의 또 다른 변화는 여성들과 이민노동자들의 증가이다.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시장 유입은 실업자로 전락한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생계를 책임지는 역할들을 여성이 떠맡는 것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임금의 남성 임금만으로 정상적인 가족부양이 어렵기 때문에 여성들로서는 일자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U의 시장통합에 따라 노동이민도 극적으로 증가했다. 남유럽이나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저임금 노동시장을 형성했다. 이주노동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그들은 기술직-전문직에서 일할 때조차 영국 노동자들보다 임금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보험 및 여타 사회지출 비용도 자국민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비용 면에서도 효율적이었다. 이민노동은 영국 사회 전체적으로 임금의 하방압력을 강화시켰으며, 임금성장을 억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2000년 이후 영국의 실업률은 줄어들었지만 이제 ‘낮은 임금’이 빈곤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유럽 경제가 붕괴되지 않았다면 영국 노동자들이 브렉싯을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유럽중앙은행과 달리 경기부양을 위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유럽중앙은행은 통화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었지만 영국은 통화정책을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금리를 낮추고 위기에 처한 금융기관들을 구제하기 위해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파운드화의 부분적 평가절하를 감수하며 시장에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상위 1%를 구제하는 것일 뿐 경제위기로 인해 불안정에 노출된 노동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반대였다. 카메론과 오스본(George Osborne)이 주도하는 보수당 정부는 긴축패키지를 영국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이는 2011년 메르켈이 주도한 ‘재정긴축 협약’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카메론 행정부의 정책 방향이기도 했다. 오스본 재무장관은 공공복지기금 축소, 주택보조금 및 장애복지기금 축소, 대학 등록금 300% 인상, 세액공제 수정 등을 골자로 하는 긴축재정 정책을 단행했다.

    이 정책들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탈산업화로 고통 받고 있던 도시들에 재정적 충격을 야기했으며,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는 가구들, 아동수당에 의존하는 가구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2007년부터 2015년 동안 영국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0% 하락했다. 이는 재정붕괴를 겪은 그리스를 제외하면 선진국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한 수준의 실질소득 감소였다.(10) 영국 노동자계급에게 세계화란 무엇이겠는가?

    5. 영국 선거,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카메론은 브렉싯 투표에서 승리할 것을 낙관했다. 이는 영국 엘리트 계급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 엘리트주의자들은 박탈당한 영국 노동자계급의 심성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세상 어려운줄 모르고 자란 철없는 영국 수상은(11), 투표를 통해 당 내외의 브렉싯 진영에게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토리당 내에서의 지반을 확고하게 다지고자 했다. EU 잔류(The Stronger In) 진영은 공포마케팅으로 대중을 위협했다. 영국이 EU를 떠나게 되면 경제위기가 올 것이고, 수입 물가는 상승하고,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극적으로 증가할 것이라 선동했다. 이는 영란은행이나 OECD, IMF 연구 보고서가 뒷받침했다.

    카메론

    보수당의 카메론 전 총리

    반면 The Leave’ 진영의 선전은 체계적이었다. EU 탈퇴 진영의 핵심 구호는 ‘삶에 대한 결정권을 다시 영국으로’(take back control)였다. 우파 민족주의 수사학과 빈곤으로 인해 확대된 반이민 정서를 동시에 공략한 것이다. 영국 독립당은 이민노동자들로 인해 영국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떠들었다. 카메론에 등을 돌린 보수당 지지층들은 극우파들의 선전에 공감했다. 더군다나 보수당 내에서도 영국의 EU 탈퇴를 지지하는 선언이 나왔다.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이 대표적이다. EU에 대한 보수당의 양가적 감정은 이제 극우파 정당의 등장으로 극적으로 확대되었다.(12)

    노동당 주류들은 잔류를 선택했다. 2015년 새롭게 당수가 된 노동당 좌파 제레미 코빈은, 비록 영국의 유로존 잔류를 지지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럽공동체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더 자주 했으며, 2011년 ‘재정긴축 협약’으로 인해 부정된 재정확장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철도와 같은 기간산업 일부를 ‘재국유화’할 것임을 천명했다. 코빈의 정책 기조는 유럽공동체의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코빈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

    좌파는 균열되었다. 노동당 좌파,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전투적 노조, 생태주의자, 사회주의 진영은 합의된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13)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국제사회주의 그룹은 EU로부터 영국이 탈퇴하는 것이 영국 노동자계급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EU를 새롭게 하는 데에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유명한 좌파 이론지인 『신좌파 평론』(New Left Review)의 입장도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좌파 잔류진영은 브렉싯이 우파 인종주의를 강화시키고 영국 내에서 외국인 혐오를 조장할 것이며, EU가 지닌 긍정적 힘조차 부정시킬 것이라고 반박했다. 좌파 잔류진영은 유로존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럽 의회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사회적 유럽’이 그들의 대안이었다. 좌파 잔류 진영의 구호는 “최악에 저항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자”였다.

    선거 결과는 브렉싯 진영의 승리였다. 계급적 좌표를 보자. 노동자계급의 66%, 하위 중간계급의 50%, 상층 중간계급 전문직 종사자 43%가 브렉싯을 지지했다. 노동자계급의 지지가 압도적이었고, 상층 중간계급도 결코 적지 않는 비율로 브렉싯을 지지했다. 지리적 균열을 보자. 잉글랜드 북부의 60%, 잉글랜드 남부 40%가 브렉싯을 지지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는 잔류진영이 우위를 차지했다. 잉글랜드 북부지역이라 해도 대학도시들에서는 잔류 지지율이 높게 나타났다. 북부의 탈산업화된 황무지에서 브렉싯의 비율은 높았다.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런던이나 맨체스터 도심에서는 잔류 지지가 훨씬 높게 나타났다. 반면 이민자노동자들의 비중이 낮은 북부의 낡은 산업도시에서는 브렉싯 지지가 높았다. 이들 지역에서는 ‘분노의 투표’(anger vote)가 지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탈산업화로 박탈감에 시달리던 북부지역 노동자계급은 런던의 상류층과 기득권자들에 대한 분노를 브렉싯 지지로 드러낸 것이다. 성별 투표성향은 이렇다. 여성 유권자들보다 남성 유권자들의 브렉싯 지지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는 이민노동자들이 남성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부분적으로 잠식해 들어온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14)

    정치적, 이념적 기준으로 브렉싯의 결과를 재단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노동당 지지자 중 대략 1/3은 EU 탈퇴를 지지했다. 노동당 왼쪽의 녹색당 지지자,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 당, 자유당의 투표층 역시 지지가 갈렸다. 웨일즈는 강력한 노동당 지지 지역이지만 EU 탈퇴가 우세하게 나타났다. 카메론이 이끄는 보수당 정부에 대한 반대투표로 이해되어야 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좌파들 내부에서도 브렉싯 지지 혹은 비판은 갈렸다. 단일한 입장이 나오지 못한 것은 이 쟁점이 인종주의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의 브렉싯 지지율이 높았으며,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잔류를 선택했다. 이는 가진 자(the haver)와 그렇지 못한 자(the non-haver)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민 반대 정서가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영국 노동자계급의 브렉싯 지지를 설명할 수 없다.

    브렉싯의 영향력을 지금 시점에서 가늠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잔류진영의 공포 마켓팅이 틀렸음은 분명하다. 영란은행이나 IMF 수석 경제학자들은 브렉싯으로 영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돌아설 것이며, 실업률은 폭등할 것이라 예상했다. 또한 금융시장은 붕괴되고 외국 자본들은 대안적인 투자처를 찾아 떠날 것이며, 초국적 금융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은 흔들릴 것이라 했다.

    그러나 브렉싯 이후의 경제지표들은 그와 같은 예상이 빗나갔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주가는 브렉싯 이후 잠시 하락했다가 다시 고점 가까이로 접근했으며, 구직자와 실업자의 차가 매우 근소해 실업률이 올라가지도 않았고 투자위험의 지표도 올라가지 않았다. 파운드의 가치는 낮아졌지만 자본이탈을 야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파운드의 평가절하는 영국 수출을 높일 수 있다. 영국의 대외무역 규모도 줄어들지 않았고, 소비심리 위축도 없었다.

    영란은행 총재 마크 카니는 브렉싯이 결정된 다음 날, 이자율을 0.5%에서 0.25%로 인하했으며, 시장에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언급했다. 영국 재무부는 법인세율을 당분간 13%로 낮추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자본의 해외이탈을 막았다.(15) 영국에 아마겟돈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6. 유로존, 어디로 갈 것인가?

    유럽공동체는 영국이 탈퇴함으로써 5억 인구 중 1/8, 유로존 전체 GDP의 1/6,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유로존 핵무기의 1/2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를 상실한다. 그러나 브렉싯에 대한 EU 지도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들은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했다면 빠른 시일 내에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EU 탈퇴를 지연시키면서, 브렉싯을 활용하여 EU 내의 영국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영국을 EU에 남겨두기 위해 영국에게만 특혜를 주는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가 유럽 대륙의 유럽회의주의를 강화하고 다른 회원국들로 EU 잔류 투표의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이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만약 영국이 유럽을 떠나겠다면, 영국은 EU와 여타 국가들이 맺은 경제협력 방안 이상의 관계는 없을 것임을 천명했다. 더불어 유로존 회원국들에게 현재의 유럽공동체의 정책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었다. 이는 독일의 입장과 동일하다. 융커가 유럽집행위원장이 된 것은 독일이 그를 적임자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융커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룩셈부르크를 조세천국(tax-heaven)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를 고안한 인물이다. 그는 룩셈부르크 수상으로 있으면서,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도청 의혹을 무마시키려고 했고, 비밀정보를 상업적 목적으로 유출했다. 룩셈부르크 의회는 2013년 이에 대해 조사했으며 그 결과 융커는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메르켈이 융커를 유럽위원회 집행위원장에 앉힌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융커는 유럽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이 이끌고 융커가 집행하는 EU는 현재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EU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브렉싯이 아니라 ‘유로 자체’이다.(16) 유럽중앙은행은 유럽공동체 시민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불평등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유럽공동체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시민-주권자의 개입은 봉쇄되어 있으며, 개별국가의 정부는 브뤼셀의 정치 엘리트 집단의 폐쇄적 결정을 따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더불어 유로존 내에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양보교섭을 강제하고 노동시장의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2016년 8월 이후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격렬한 노동자 투쟁은 그와 같은 노동시장 개혁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 회의주의는 확산될 것이고, 더불어 회원국들 내의 극우파들의 지반은 확대될 것이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극우파들은 꾸준히 약진하고 있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공조체제는 당분간 흔들리지 않겠지만 극우파의 약진으로 인해 중도파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고 있다. 브렉싯은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경고일 수 있다. 물론 유럽 지도부들은 이를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유로존을 변화시키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영국,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에서 독립적인 새로운 사회운동과 좌파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운동의 힘은 2008년 이후 사회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두드러진 것은 청년세대의 정치 개입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에 반대하며, 긴축재정 반대, 복지 확대, 노동권 존중, 최저임금 강화 등 새로운 요구사항을 전면에 내 걸고 약진하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공산당과 사민주의좌파들, 신좌파들은 새로운 연대를 구성하고 있다.

    브렉싯 이후 영국에서는 노동당 좌파 제레민 코빈이 당수로 재선되었다. 노동당 원내정당을 장악한 우파들이 코빈을 당 지도부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당원들, 지지자들, 당원투표 등록인들은 압도적으로 코빈을 지지했다. 코빈은 노동당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일반 당원들의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유럽적 수준에서 보자면, 대안좌파 세력은 아직 미미하다. 지속되는 유로존의 위기가 극우파의 강화로 귀결될지, 중도우파-좌파의 신자유주의적 유럽이 지속될지 혹은 대안좌파들의 성장으로 새로운 유럽을 건설할지 아직 결정 나지 않았다. 브렉싯이 분명히 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로존의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점이다. 유럽 인민들이 어떤 대안을 선택하는 가는 아직 열려 있는 질문이다.

    <참조>

    1. Martin Woolf, “Brexit will reconfigure the UK Economy,” Financial Times (24. June. 2016): Timothy Garton Ash, “As an English European, This is the Biggest Defeat of my Political Life” The Guardian (24, June, 2016).

    2. Perry Anderson, ” Turmoil in Europe,” New Left Review, (Jan.-Fev., 2012), Vol. 73.

    3. Jürgen Habermas, “Europe’s post-democratic era,” The Guardian (18. Nov. 2011).

    4. Susan Watkins, “The Political State of the Union,” New Left Review (Nov.-Dec., 2014), Vol. 90; Susan Watkins, “Casting off?”, New Left Review (July-Agu., 2016), Vol. 100; Perry Anderson, The New Old World (Verso, 2009). 유로존의 역사에 대한 정리는 이 세 글에 크게 의존했다. 구체적인 인용은 생략한다.

    5. 딘 베이커 “브렉싯트, 긴축 그리고 EU의 미래” 『한겨레』, (2016. 7. 17)

    6. Tom Nairn, “The Left against Europe?”, New Left ReviewⅠ (Sep.-Oct., 1972), Vol. 75.

    7. Watkins, “Casting off?”

    8. 셀리나 토드, 『민중: 영국 노동계급의 사회사 1910-2010』 (2016, 도서출판 클), p. 449.

    9. 토드, 『민중』, pp. 450-451.

    10. Laura Gardiner, Stagnation Generation (Resolution Foundation, 2016), p. 11.

    11. Dan Stewart, “Why David Cameron’s ‘Pig-Gate’ Scandal Isn’t Going Away” The Time (Sept. 21. 2015)

    12. Rafael Behr, “How Remain failed: the Inside Story of a Doomed Campaign,” The Guardian, (July 5, 2016).

    13. Watkins, “Casting off?”

    14. Michael Ashcroft, How the United Kingdom voted on Thursday..and Why?, Lord Ashcroft Polls (July, 24. 2016).

    15. Larry Elliott, “Brexit Armageddon was a Terrifying Vision – but It Simply hasn’t happened,” The Guardian (Agu. 20. 2016).

    16. Joseph Stiglitz, The Euro and its Threat to the Future of Europe (Allen & Lane: 2016); Joseph Stiglitz, “From Brexit to the Future,” The Project Syndicate (Jul. 6. 2016).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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