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희롱은 범죄다
    [빵과 장미] 타자에 대한 희롱는 차별의식에서 비롯
        2012년 08월 07일 03:3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성희롱을 성희롱이라 하면 유연하지 못한 사람이 되거나 오히려 피해자에게 원인을 제공했다는 타박을 하기 일쑤다. 관련법이 있어도 성희롱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고 고무줄처럼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다.

    성희롱의 상대성, 특히 증거나 목격자를 찾기 어려워 소송을 해도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기 어렵다. 게다가 갈수록 증가하는 직장 내 성희롱은 권력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기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의 조사에 따르면 유럽연합 가입국의 여성 노동자 40~50%가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한다.

    2010년 발생한 현대차 아산공장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 대해 이뤄진 성희롱과 해고를 규탄하고 있는 모습(사진=노동과세계)

    프랑스에서는 20년 전인 1992년 7월에 처음 소개되었던 성희롱 관련법이 그 동안 제 구실을 못하는 일이 빈번하여 꾸준히 비판을 받아오다 지난 5월 4일 결국 삭제되었다.

    더 구체적으로 성희롱의 개념을 정의하고 처벌의 수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노동법 내에 성희롱 금지 법안을 넣거나 성차별 금지 법안을 별도로 만드는 나라들의 사례가 늘어나면서 프랑스의 모호한 성희롱 관련법도 시대에 맞게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후 거의 석 달이 지나 지난달 말에 드디어 새로운 성희롱 관련법이 드물게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했다.

    삭제된 이전 법에는 성희롱 가해자에게 1년의 징역과 1만 5천 유로의 벌금이 주어졌었다. 그러나 새로운 법에서는 2년의 징역과 3만 유로의 벌금이 주어진다. 처벌이 배로 늘어난 것이다.

    또한 권력 남용에 의한 성희롱, 15세 이하에게 가해를 한 경우, 피해자가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장애가 있는 경우, 그리고 가해자가 여러 명일 경우 등에 대해서는 3년의 징역과 4만 5천 유로의 벌금이라는 가중처벌이 이루어진다.

    과거에 비하면 성희롱의 처벌이 훨씬 무거워지긴 했지만 가중처벌 대상이 아닌 경우 여전히 절도에 비해(3년의 징역과 4만 5천 유로의 벌금) 처벌 수위가 낮다는 점을 일부 여성단체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법안에서는 ‘성 정체성’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성 전환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 차별이나 모욕을 해도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그 동안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얻어낸 결과로 관련 단체들은 크게 기뻐한다.

    갈수록 성 전환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지 않게 되면서 이들을 겨냥한 욕설과 경멸, 성폭력 등도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프랑스에 성 전환자 수는 현재 1만 5천명 정도로 파악되는데, 직장 내 동성애자와 성 전환자들의 차별 현황에 대한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의 보고서(2010년 12월)를 보면 성전환자의 50% 이상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한다. 동성애자와 달리 성전환자들은 성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였다.

    더구나 성 전환자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직장을 잃을 확률도 다른 이들에 비해 세 배나 높고, 이렇게 실업자가 된 이들의 40%는 노숙자가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사회적 약자와 빈곤계층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여성단체나 성소수자 활동 단체 등에서 전반적으로 이번 성희롱 관련법에 만족하지만 여전히 세심한 용어 사용을 두고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 정체성’이라는 언어를 두고 Identité sexuelle(생물학적 성 정체성)이 아닌 Identité de genre(사회적 성 정체성)를 사용하기를 관련 단체들은 요구했었다. 그러나 ‘사회적 성’이라는 개념을 사법적으로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sexuelle’이라는 단어를 유지하게 되었다.

    앞으로 ‘성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아마도 문화적으로, 사법적으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이처럼 아직 논란이 있는 개념들이 남아있지만 대체적으로 성범죄의 사각지대에 있던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반영했다는 면에서 진일보했다고 평가된다.

    물론 이런 법이 마련되어도 한계는 있다. 길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가벼운(?) 성희롱에 대해서는 딱히 대책이 없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길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지나가는 여자에게 “엉덩이에 확 박아줬으면 좋겠다!”라며 상스럽게 구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응할 수가 없다.

    그런데 길에서 이런 무례를 범하는 사람들은 흔히 교육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교양 있는’ 이들은 말한다. 괜히 이민자들의 교육 수준을 운운한다거나 아랍인들의 종교를 들먹거리며 길거리에서의 저속한 성희롱은 못 배운 아랍 이민자들의 마초성인 냥 치부하며 또 다른 차별을 낳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주 교양 있고 우수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 모여있는 의회 내에서도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는 걸 보면 성차별의 문제는 범 사회적이다.

    성희롱 관련법이 통과되기 바로 얼마 전 국토주택장관인 세실 뒤플로가 의회에서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오자 이내 남성의원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 UMP(대중운동연합) 소속 의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녹색당 출신으로 37세의 젊은 여성 장관인 뒤플로가 흰 바탕에 푸른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자 그 동안 교양 속에 감춰져 있던 마초적 성질이 숨김없이 드러난 것이다. 이 장면은 언론을 통해 동영상으로 번져나갔고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대중들은 트위터를 통해 대중운동연합(Union pour un mouvement populaire)이라는 이름의 약자인 UMP를 ‘대중마초연합Union des Machistes Populistes’, 이라고 부르며 비꼬았다.

    나아가 “그런데 최악의 상황은 바로 저런 인간들이 성희롱 관련법을 만든다는 거다.”라며 그들의 자격을 지적했다.

    이날의 ‘사건’에 대해 사회당의 올리비에 뒤소 의원은, 이제는 여성들에게 “주방으로 돌아가라!” 혹은 “살림이나 해!”라는 말이 나오는 시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남성의원들이 여성의원을 ‘동료로’ 덜 여긴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리고 여성혐오자들이 아직도 의회를 차지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 ‘동료로서’ 여기기보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것에 더 열렬히 반응한다.

    이번 올랑드 정부에서 국회의 27%가 여성으로 이루어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 정치인이 참여하고 있음에도 성차별 논쟁은 여전히 떠날 줄 모른다. 몇 년 전 강용석 의원이 여성 의원들을 두고 이리저리 외모 평가를 했던 일을 떠올려 보아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여성 의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성’에게만 방점이 찍혀있지 자기와 함께 일하는 동료 ‘의원’이라는 걸 망각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성희롱과 성추행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모여 성희롱 관련법을 만든다는 게 사회의 모순이다.

    그렇기에 처벌의 수위만 높인다고 해서 반드시 성희롱이 줄어든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성적 농담의 경우 대부분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성적 농담 속에서 여성이나 성소수자는 희화화 되기 일쑤다. 그리고 이렇게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남성’ 기준의 욕망으로 점철된 표현을 표현의 자유라며 자신들의 차별적 행동을 변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건, 여성의 성욕, 동성애자의 성욕, 노인의 성욕, 청소년의 성욕, 그리고 장애인의 성욕 등에 대해 사회는 터부시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성에 대해 과연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가.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렇기에 가장 주류를 차지하는 그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남성’ 중심의 욕망의 자유를 주장하기 전에 다른 쪽의 욕망은 어떻게 억압 당하고 있는지 고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소수자의 성은 쉽게 그들의 농담 속에서 희화화 되거나 피해자로 등장한다. 나에게는 자유였으나 누구에게는 억압이며 차별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면 희롱을 희롱이라 부르지 못하고 나아가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은 지속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한 개그맨이 학창시절 동성 친구에게 고백을 받고 토했다는 그 경악할 발언을 방송에서 했다는 소식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극히 이성애자 중심의 사고에 물들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발언을 공공연히 할 수 있다. 그것은 농담도 개그도 아닌 이성애자의 횡포다.

    또한 성희롱이란 행동이 대체로 권력관계에서 벌어지기에 여성과 성소수자의 노동환경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경제적 약자를 더욱 약자로 만든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에 성희롱은 개인간의 분쟁이라기 보다 ‘차별이 가능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범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희롱은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의 결핍, 즉 차별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차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동은 취향의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하다. 몇 달 전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한 포스터의 문구를 인용하겠다.

    “차별은 견해가 아니라 범죄다.” 

    필자소개
    집필 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