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 좌파의 몰락인가?
    무엇을 바꾸고, 또 바꾸지 못했나
        2016년 10월 05일 10: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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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일 베네수엘라 야당(MUD)이 주도한 “카라카스 접수”라는 이름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야당이 이런 대규모 대중시위를 주도하는 이유는 마두로 정부에 대해 브라질과 비슷하게 의회권력을 통한 헤게모니 확산을 거쳐 국민소환투표를 통한 마두로 축출을 위한 것이다.

    한편, 심각한 경제, 정치적 위기 앞에서 베네수엘라 친 차베스 진영의 “사회주의 운동”(Marea Socialista)세력은 현재의 외환통제 정책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의 라틴아메리카 좌파 변혁의 동력은 대통령 등 지도자와 정당 즉, 엘리트들이 아니라 대중이 중심이 된 반 헤게모니 사회운동의 결과였다. 현재 그들의 힘은 그렇게 많이 약화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최근의 정치 변화는 제도정치의 상층부인 공중전에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사회학자인 스밤파에 의하면 현재 라틴아메리카 우파의 약진은 사회전체의 헤게모니 확립을 통한 제대로 된 약진이라기보다 좌파정부에 의해 제약된 이윤 획득 구조를 자본가들이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한 조급하고 불안한 대처로 보고 있다.

    다국적 기업과 연동된 우파가 “인공적인 방법(예를 들어, 브라질의 경우, 의회 쿠데타)을 통해서라도 대중으로 하여금 좌파 정당과 리더의 뒤를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한 은폐된 공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라틴아메리카의 반 헤게모니적 사회운동세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의 경우, 잘못된 외환정책 때문에 심각한 경제위기 (특히 식품과 의약품의 품귀 등)를 불러왔지만 사회 구조적 변혁과정(예를 들어, ‘꼬무나스’로 불리는 자율적 공동체 조합의 활성화와 다양한 직접민주주의의 실험 등)은 장기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경우에도,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현재 대통령이 된 테메르에 대한 지지율은 약 2%에 지나지 않고 약 60%의 시민이 그의 퇴임을 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대중의 차가운 반응은 현재의 국면에서 지우마 정권의 퇴진은 실현되었지만 우파 헤게모니 전환에는 쉽지 않을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테메르를 대신할 우파 측의 대통령 후보도 없다고 한다.

    멕시코의 ‘라 호르나다’지 칼럼니스트인 기예르모 알메이라는 세계적 불황으로 인한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의 하락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등 라틴아메리카에 직격탄이 되고 있는데 이런 국면을 신자유주의 우파 세력이 기민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우-마두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위)과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라틴아메리카 좌파 블록의 몰락?

    얼핏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바라보면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블록의 몰락이 시작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의 좌파 정부는 유지되고 있다. 세계적인 주류 언론의 보도들을 보면 베네수엘라는 당장 무너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9월 1일의 베네수엘라 야당이 주도한 반정부 대중 시위 외에 친 차베스 진영의 대중 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 베네수엘라 마르가르타 섬에서는 약 120여 정부 대표들이 모인 제 17차 비동맹운동 정상회의가 열려 마두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경제 비상사태를 연장하는 것을 승인하여 마두로 행정부에게 비상권력을 부여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NGO들은 야당이 마두로 대통령의 국민소환투표를 청원하기 위한 서명 명단에 속임수를 사용했다고 비판하고 이를 UN 인권이사회에 문제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올해 2016년 안에 국민소환투표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좌에서 우로의 헤게모니 도전의 과정에서 베네수엘라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우파 정부의 정착이 상대적으로 순조롭다고 해도 베네수엘라에서 좌파 정부가 건재하다면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 노선으로의 복귀는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차베스혁명의 상대적 성공(?)으로 라틴아메리카 정치 지형의 여러 수준에서 구조적으로 베네수엘라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우 선회 이후 베네수엘라를 메르코수르에서 축출하려고 하는 것만을 보더라도 역설적으로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의 차이와 유사점

    차베스 혁명의 가장 큰 강점은 많은 기층대중을 언제라도 거리에 모이게 할 수 있는 대중권력이 상당한 정도로 커졌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사회권을 인권의 중요한 테마로 인식시킨 점, 대의정치 미작동의 문제에 대한 비판과 보완적 장치의 마련, 기층 대중의 영토성 확보를 통한 자율성 증대, 권력과 자본의 사회화의 추진 등이 가능했다.

    이와 달리 브라질의 지우마 정권 퇴진은 대중보다 중간계급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탄핵이 성공한 것도 기층대중에 비해 중간계급의 시민들이 탄핵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국가의 사회적 재분배 정책의 강화에 대해 기득권층과 중간계급이 이를 용인해주었지만 현재 경제가 어렵게 되자 얘기가 달라진 것이다.

    반면 베네수엘라 혁명의 가장 큰 약점은 약 15~16년의 좌파 정부 집권기간 동안 석유 수출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서 벗어나 농업 정책을 비롯하여 경제, 산업구조의 실질적 변혁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노동자 공동경영, 조합운동 등의 새로운 정책 기획들도 기대한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그동안 존재했던 행정 관료 시스템의 비효율성은 더욱 악화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좌파 지식인인 아틸로 보론에 의하면, 이번 브라질의 지우마 탄핵 사건을 통해 세 가지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여당이 가져왔던 중도 우파에 대한 양보, 타협이 전략적 실수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테메르 부통령의 배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둘째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진보적 사회 정책을 통해 기층대중에게 유리한 정책 집행을 했지만 가난한 대중의 소득 자체를 늘리진 못했기 때문에 대중의 정치적 지지가 어느 나라에서나 항상 매우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베네수엘라와 같이 대중에 의한 탄탄한 자율적 조직체 형성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는 자유주의적 제도 즉, 의회 전략을 너무 의지했다는 것이다. 탄핵 조짐이 있을 초기 단계에서 ‘길거리 민주주의’ 전략이 더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비해 아르헨티나의 사회학자인 마리스테야 스밤파는 현재의 정치지형의 변화를 “진보주의-이후”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좌파의 위기가 다양한 외부적 원인 예를 들어, 미국의 주류 미디어를 통한 압박, 우파의 다양한 공세 전략 등의 변수를 제외하더라도 국면적인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는 구조적 위기로 보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기층대중이 중심이 된 사회운동이 추동한 진보주의의 큰 실수는 사회운동에만 매몰하여 자유주의적 맥락 안에서의 정당정치, 의회정치의 제도적 힘을 경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층대중이란 일반적 의미의 대중이 아니라 경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예: 실업자들, 행상 등의 비공식 노동자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좌파 정부들의 상층부가 기층대중의 시위 등의 풀뿌리 사회운동을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전통적인 노동운동 조직, 원주민 조직, 농민조직, 국영기업 노조, 군부 일부 등의 전통적 제도적 조직의 역할을 정치 지형의 변수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바꾸지 못했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의 좌파 정부가 경제, 산업 정책에 있어서는 좌파적이지 않은 정책수단들을 도입하면서 진정한 변혁에 시동을 걸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베네수엘라, 브라질에서 좌파가 권력을 장악했던 것은 경제, 사회적 위기의 해결을 요구하는 ‘대중의 요구’에 호응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집권이 계속되면서 좌파정부도 당연히 국가발전, 경제발전을 위한 ‘주류적’ 정책수행을 해왔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 외환정책의 실패 즉, 필수 생필품의 공급 실패에서 뚜렷이 드러나듯이 경제정책 기획, 추진에서 ‘관료 엘리트’와 ‘외국자본’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장기적일지라도 대안적, 유토피아적 정치의 비전과 구체적 경제 산업정책을 서로 연결하는 정책 도출을 엘리트가 아닌 대중에게 구할 수는 없었다. 오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구조 자체의 대안적 추구를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즉, 농업과 광물 추출의 경제 구조를 대신할 경제모델의 제시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경제정책 부문에서 적어도 우파 정부와 큰 차이를 보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자유주의적 산업정책을 통해 부르주아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들 중산층 내지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키워 준 정부와 노동자에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즉, 국가발전과 경제 발전을 지향하며 일차상품 수출경제의 구조에서 벗어나 산업의 다변화를 이룩하려고 했으나 경제발전을 위한 달러화 획득을 위해서 일차상품의 수출에 다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 때문에 정치, 사회적 구조가 과거에 비해 크게 변화했다. 전반적으로 중간계급의 경우 소비주의, 개인주의가 커지고 사회적 파편화도 진행되었다. 물론 다른 지역에 비해 기층대중이 주체가 되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비판적 사회운동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 지구적 질서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영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최근 지우마 탄핵사건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느냐 마느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이런 결과를 낳은 원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신자유주의 이전 시기(1980년대 이전)의 이분법적 계급투쟁의 관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좌파 정부들이 크게 바꾸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브라질의 노동자당과 정부는 실제 경제정책은 일부 재분배 정책을 제외하고 시장의 발전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집행했다. 그러므로 토지문제 해결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갈수록 대중동원능력과 저항능력을 잃어갔고 ‘중도화’ 된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의 탄핵사건이다. 거칠게 말하면 재분배 정책을 제외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모델에서 그렇게 멀리가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개인주의, 소비주의의 일상문화의 모델을 점진적으로 소규모 자율조직을 통한 공동체주의로 나아가느냐 하는데 있다. 그럴 수 있는 에너지를 라틴아메리카 좌파세력은 가지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구체화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소개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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