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 노동자들은,
    달아난 세월호 선장이 아니다
    공공노조와 총파업이 '아름다운 동행' 되기 위해서
        2016년 10월 04일 02: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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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동행

    지난 9월 27일부터 시작한 공공부문 파업이 2주차에 접어들고 있다. 파업을 진행하는 공공운수노조는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상징하는 이 야만의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동행’이라는 게 무엇이던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가고, 서로 배려하고, 목적지까지 갔다가 함께 돌아오는 그런 것 아니던가? 이번 파업에 함께한 16개 사업장은 물론 다른 노조, 그리고 시민들도 이 투쟁에 함께 하기를 희망하면서 쓰는 표현이겠다. 이 척박한 시대에 진실로 아름다운 동행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이 가려는 사람끼리 마음과 조건이 잘 맞아야 한다. 과연 그런가?

    공공부문 노조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제목의 찬송가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 순간, 너희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묻는 흑인영가를 번안한 노래다. 애절하다. 그토록 믿던 수제자 베드로마저 “닭이 울기 전 3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언대로 예수를 부인한다. (이 장면은 영화 [곡성]에서 은유를 담고 실리기도 했다) 이제 묻는다. 국민의 피해를 걱정한다던 공공부문 노조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한국전력공사는 서민들에겐 요금 폭탄을 안기면서 1인당 2천만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챙겨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전 임직원의 평균 연봉이 7,400만원이라 한다. 작년에 성과급만 3,600억원이었다. 물론 한국노총 산하이고, 이번 투쟁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돈으로 서민들의 요금폭탄을 감면하자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른 공기업 역시 수천억의 흑자를 냈을 때도 자기들끼리 나눠먹기에 급급했다. 그런 공기업이 널려 있다.

    보수 언론이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라고 말할 때 통하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에 파업에 돌입하는 공공부문 노조들은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공공부문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공공성의 요체다

    이런 측면에서 벌써 8일째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공공부문 노조가 보이는 행동은 아름답다. 비로소 공공부문 노조답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지향점을 가지기 시작한 듯하다.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은 “의료보험 없이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은 건강하게 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개인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민영철도를 타게 하는 것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는 침몰하는 배를 두고 달아난 세월호 선장이 아니다. 효율화라는 미명으로 압박하는 안전의 외주화는 국가폭력이다. 우리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없다.”라고 총파업 선언을 했다.

    서울대병원 박경득 분회장은 “국민이 질병으로 더 많은 돈을 쓰고, 그래서 병원이 더 많은 수익을 내면 그 수익으로 더 많은 성과급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 성과급을 포기하고, 정부의 불의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라고 연설했다. 이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버릴 수도 있음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들의 말대로 공공부문 파업은 세월호 참사로 “무고한 아이들을 먼저 보낸 살아남은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했던 전태일 열사 앞에 드리는 추모사이고, 국가폭력에 희생된 고 백남기 농민에게 드리는 조사”이어야만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조원 누적흑자로 성과급이 최근 5년간 2,200억원이었다. 이에 대해 노조는 “국민에게 건강보험료를 더 받고 의료보장을 줄여야 더 준다는 그런 성과급, 국민연금과 산재보험을 지급하지 않아 생기는 흑자로 만들어지는 성과급이라면 우리 노동자들은 받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조가 많아져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공공기관을 서민의 품으로

    그러나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공공부문 노조들은 “성과연봉제가 국민의 피해로 돌아갈 것을 가장 우려”하면서 돌입하는 파업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과연봉제 없이도 국민들의 삶은 무너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유가족들이 단식까지 하고, 특별조사위원회조차 강제로 무산되는 그 때 우리 노조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이제 차가운 안치실에 누워 계신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 전체를 위협하는 사드가 배치되는 민족 전체의 위험상황에 최소한 성주와 김천에 있는 노조라도 최대한 동원지침을 내린 적이 있는가? 스무살도 안 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컵라면을 가방에 넣어 둔 채 세상을 등졌을 때 노조는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서울지하철과 도시철도노조는 구의역 사고가 났을 때 처음부터 “우리 잘못입니다”라고 사과를 하면서 대책위원회에 적극 결합했다.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안전과 생명’을 면피용 액세서리처럼 사용하면서 사업장 담벼락 안에 있는 조합원들의 고용과 임금에만 몰두했다면 이 기회에 그 벽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래야 시민들이 ‘그들의’ 성과연봉제 저지에 “아름답게 동행”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생기게 된다. 자신들이 절박한 투쟁을 할 때만 국민을 입에 담는 행위는 결코 ‘동행’하자는 태도가 아니다.

    돌아보고, 앞으로 나가야

    1999년 서울지하철노조를 중심으로 한 4.19 파업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IMF를 빌미로 한 노동자에 대한 일방적인 고통전담 정책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후 구조조정으로 공공부문 노동자 17만명이 직장을 잃어야 했다. 각종 외주화로 비정규직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렇듯 노조의 투쟁 성패는 노동자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공공운수노조는 이번 투쟁에서 “노동 존중과 공공성과 생명·안전 강화”를 내걸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위해, 백남기 농민의 경찰폭력 진상규명을 위해 총파업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적어도 노조가 일상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온 몸으로 껴안고, 그 맨 앞에 서겠다는 자세가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동행”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투쟁이 공공부문 노조가 거듭나서 이 시대 모든 아픔을 껴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야만 하고, 그럴 때가 되었다. 노조는 “함께 갔다 함께 돌아오자”라고 한다. 투쟁이 성공적으로 끝나 그런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고, 함께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아름다운 동행”도 이어지길 바란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 정책실장. 정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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