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씩씩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판타지
[그림책]『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닐 게이먼/주니어 김영사)
    2016년 10월 04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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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많은 그림책

저는 글이 많은 그림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림책이 아무리 문학과 미술이 만나서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제 눈엔 글보다 그림이 더 예쁩니다. 저 자신이 이야기 작가이자 그림책 편집자이면서도 언제나 그림책의 텍스트는 최소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은 그림책으로서는 1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것도 단숨에, 너무나 궁금해서 후루룩 들이마셨습니다.

미녀

세 난쟁이

도리마는 캔슬레어의 이웃나라입니다. 하지만 까마귀조차 도리마로 날아가지 못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우뚝 선 산맥이 너무나 험하고 높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그 산을 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법의 힘을 가진 난쟁이들조차 그 산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난쟁이들에게 그 산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난쟁이들은 산 밑으로 다녔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난쟁이들은 달걀만한 루비를 가지고 여왕에게 선물할 비단을 사러 도리마로 갑니다. 난쟁이들은 땅속에서 캐닌 루비를 여왕에게 선물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습니다. 선물을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선물을 구하러 가는데 들인 ‘거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잠에 빠진 도리마

도리마의 폭슨 여관에서 난쟁이들은 영원한 잠의 전염병을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을 만납니다. 마녀의 저주를 받은 공주가 잠에 빠지자 성안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씩 잠이 들었고 이제 잠의 전염병은 온 나라로 번져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 잠들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난쟁이들은 도리마의 거리로 가서 직접 잠든 사람들과 동물들을 보고 폭슨 여관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폭슨 여관의 사람들 역시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놀란 난쟁이들은 서둘러 여왕에게 달려갑니다. 영원한 잠의 전염병은 이제 곧 캔슬레어로 번질 것입니다.

결혼식을 앞둔 여왕

일주일 뒤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발표한 여왕은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결혼식을 연기합니다. 당장 이웃나라 도리마의 공주에게 걸린 ‘영원한 잠’의 저주를 풀지 못하면 자신의 나라인 캔슬레어 역시 영원한 잠에 빠지고 말테니까요.

이제 마법의 힘을 지닌 세 난쟁이와 한때 일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여왕이 이웃나라 도리마의 공주가 걸린, 영원한 잠의 저주를 풀기 위해 모험을 떠납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 『백설 공주』 = ?

여기까지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백설 공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책을 보는 내내 전혀 새로운 작품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난쟁이, 마녀, 잠의 저주, 물렛가락, 공주, 여왕, 입맞춤 등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백설 공주』로부터 거의 모든 캐릭터와 설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는 전혀 새로운 환타지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세련된 화법과 현대적인 가치관으로 새로 쓴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게다가 상상 불가능한 반전의 재미까지 선사합니다!

독자의 손을 끌어당기는 그림

이미 검증된 이야기꾼인 닐 게이먼이 환타지의 뼈대를 만들었다면, 크리스 리들의 그림은 닐 게이먼이 만든 뼈대에 피와 살을 입히고 생명을 불어 넣었습니다.

크리스 리들은 흑백의 펜화에 금색 하나만을 특징색으로 활용해서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전합니다. 신비로운 표지 그림은 책을 펼치게 만듭니다. 환상적인 세계와 등장인물들은 직접 목격한 것처럼 세밀합니다. 면지에는 거대한 산맥으로 나뉜 도리마와 캔슬레어의 전경이 펼쳐지고 본문에서는 매혹적인 그림들이 독자의 손을 계속 끌어당깁니다.

그는 왜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백설 공주』를 새로 썼을까?

도대체 왜 닐 게이먼은 마법사도 왕권도 사라진 오늘날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백설 공주』를 모티브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두 이야기 모두 아름다운 공주들이 마녀와 여왕의 저주와 음모로 희생되지만 왕자들로 인해 마녀와 여왕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성차별과 신분제도 때문에 핍박받던 여성들에게 구원과 희망의 사랑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두 이야기 모두 여성의 적은 여성이고 신분이 높은 남성만이 여성을 구원한다는, 봉건적이고 성차별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닐 게이먼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백설 공주』를 새롭게 쓴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새로운 『백설 공주』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지도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진짜 씩씩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책,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은 놀랍게도, 진짜 씩씩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판타지입니다.

필자소개
이루리
동화작가, 그림책 평론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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