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레미 코빈 재선,
    좌파세력에 던지는 과제
    영국 노동당 경선 : 현실에 대한 불만, 그 강력함과 새로움
        2016년 09월 29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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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토요일 치러진 영국 노동당 대표 재경선의 결과를 다룬 ‘영국 노동당 경선, 코빈 재선의 의미와 과제’ 글에 이어 그 의미와 과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다룬 서영표 교수의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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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브렉시트(Brexit)를 선택한 국민투표 직후 영국 노동당 대표인 제레미 코빈(Jeremy Corby)은 자신의 당 의원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미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조차 포기한 블레어주의자와 여기에 동조하는 당권파 의원들이 보기에 코빈은 처음부터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들에게 코빈의 일관된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의 향수와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에 기초한 강한 ‘영국’을 이끌기에는 ‘허약한’ 것이었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한 긴축과 복지 축소는 보수당뿐만 아니라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고든 브라운(Gordon)의 노동당 정부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었다. 블레어주의자들에게 좌파로 낙인찍혔던 브라운의 후임 에드 밀리밴드(Ed Miliband)의 어정쩡한 태도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당권파들은 코빈의 사회주의가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코빈은 당권파들이 80년대 노동당을 망쳐 놨다고 생각하는 벤주의자(Bennite, 좌파 정치인 토니 벤Tony Benn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던 노동당 내 좌파 그룹)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딴지걸기에 여념이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자의 지지를 받는 극좌파라는 비난부터 전혀 근거 없는 반페미니스트라는 혐의까지 제기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이스리엘의 폭력에 반대하는 반시오니즘(anti-zionism)을 반유대주의적(anti-semitic) 인종주의로 낙인찍기도 했다.

    당권파들이 ‘반란’을 일으킨 근거는 코빈이 유럽연합 잔류 캠페인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대표 선거에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의 59.5 퍼센트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대표를 1년도 되지 않아 내쫓는 이유로는 충분치 않았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더 기가 막힌다. 노동당 지지자들 중 잔류 지지 비율은 63%였다. 드러내놓고 잔류를 주장했던 스코틀랜드 민족당(Scotland National Party, SNP) 당원의 잔류 지지 비율이 64퍼센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코빈을 비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당권파들이 코빈의 ‘미적지근한’ 캠페인의 근거로 생각한 것은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수상과 토니 블레어가 주도하는 캠페인에 그들과 나란히 서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코빈으로서는 캐머런과 블러어의 동맹에 참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코빈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은 캐머런 정부의 긴축과 복지 축소에 저항하는 것인 동시에 보수당 정부와 큰 차별성이 없었던 신노동당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유럽에 남기를 원하지만 ‘지금의 유럽’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노동당의 선택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코빈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잔류 캠페인을 진행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당권파들의 반란은 ‘트집 잡기’에 다름 아니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반란의 첫 번째 단계는 성공했다. 의원단의 투표로 대표 불신임 결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코빈이 대표 재선거에 나서는 것 자체를 봉쇄하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현직 대표는 자동적으로 대표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의(National Executive Committee, NEC)의 유권해석이 내려진 것이다.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 의원들의 추천이 필요했지만 그걸 얻을 수 없었던 코빈에게는 기사회생이었다. 노동당에 기부한 부호가 NEC 결정에 소송을 제기한 희극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난 9월 22일 발표된 선거결과는 당권파들의 의도와는 달리 코빈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고 말았다. 작년 9월 당대표 선거보다 더 많은 61.8퍼센트를 득표한 것이다. 코빈과 대결할 단일 후보로 오언 스미스(Owen Smith)를 내세우고도 이런 정도의 결과와 마주한 당권파들의 당혹감은 클 수밖에 없다.

    코빈

    코빈의 힘겨운 과제와 반대파들의 태세

    코빈의 지지가 더 강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작년 9월 대표 선거에서 당원이 아니어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던 3파운드의 등록비를 25파운드로 올리고, 2016년 1월 12일 이후에 당원이 된 사람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이겨낸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결정은 코빈 지지자들의 투표 참여를 제한하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승리는 그만큼 기성정치권, 특히 노동당 당권파들에게 대한 환멸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an Westwood)는 영국 정치인들 중 범죄자가 아닌 사람은 제러미 코빈과 캐롤라인 루카스(Caroline Lucas,녹색당 하원의원) 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영화배우 엠마 톰슨(Emma Thompson)이 코빈을 지지했고 80대의 사회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는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에 대항해 ‘코빈과의 대화’라는 1시간짜리 필름을 제작하기도 했다.

    어쨌든 코빈이 다시 당대표로 선출된 것은 영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 언론과 자기한 속한 당마저도 합세해서 벌인 온갖 왜곡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비방전을 극복한 것이기에 ‘승리’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컸다. 비방은 그에게만 향하지 않았고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게도 조준되었었다. 문제는 코빈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대표에 선출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거짓말, 왜곡, 비방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재선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예상했던 그대로. 그리고 언론은 그가 더 많은 지지로 당대표에 다시 선출된 것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했다. 반란을 시도했던 노동당 의원들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그들의 편에 선 언론과 당 밖의 지지자들(예를 들어 노동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큰 손들)과 연합해서 새로운 공세를 전개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코빈은 당대표로, 그리고 미래의 수상으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다음 번 총선의 승리를 이끌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당 주류가 언제나 집착했던 기존 질서의 수호와 헌정주의에 비추어보면 이런 생각은 당연하다.

    당대표 선거 토론회에서 오언 스미스를 향해 ‘모두가 블레어를 싫어한다’고 외친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코빈이라는 ‘광대’에 열광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쫓는 것은 포퓰리즘에 굴복하는 것이고 정치엘리트의 길이 아니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권파들에게 켄 로치의 필름에 등장하는, 일자리, 복지, 교육, 의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평범한 세필드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그들보다 ‘영국’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여론과 당권파들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비난은 코빈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당) 입당 전술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토니 벤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했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마치 자기네 당의 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지지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빌미를 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다. 코빈을 지지한 31만 여 표가 모두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극좌파는 아닐 테니 말이다. 언제나 극소수의 불과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갑작스럽게 엄청나게 세력을 키운 모양이다.

    하지만 상황은 당권파들에게도 녹녹치 않다.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코빈이 더욱 강화된 지지를 얻게 됨에 따라 다음 번 총선까지 그를 쫓아내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물론 비방전을 계속 전개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겠지만 그 기회가 쉽게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음 총선은 2020년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를 쫓아낼 구실은 총선 패배일 수밖에 없는데, 총선 패배는 곧 자신들의 의석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회노동당(Parliamentary Labour Party, PLP)은 당분간 드러내놓고 분열적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1981년 자유주의 분파가 당의 좌경화를 비판하면서 떨어져 나가 자유당을 만들었던 것 같은 분열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권파들의 선택이 당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데 협조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기회를 엿보며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코빈 지지 청년세대의 새로움과 낯섬

    당 바깥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일단 코빈에 대한 높은 지지, 특히 새롭게 노동당에 가입하거나 선거인 명부에 이름을 올린 청년층이 가진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매우 깊다. 그들이 코빈을 통해 표출하고 싶은 열망은 신자유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낡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들의 지지를 정치적인 힘으로 조직화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들은 대처주의 시대에 태어나서 자라난 신자유주의 시대의 ‘아이들’이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던 세대로, 조직화된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다. 매우 강한 불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정치적인 운동으로 전개해야 할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세대인 것이다.

    또한 그들 아주 가까이에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 선동이 있다. 코빈을 지지하는 80년대 식 사회주의자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다. 코빈의 노동당은 이렇게 조직화되지 않는 불만을 80년대와는 다른 방식,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조직화함으로써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극우적 선동을 무력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회 노동당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 매우 험난한 길이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보수당 정부도 겉으로 드러난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 의석수도 야당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고 브렉시트를 둘러싼 당의 분열은 심각하다. 캐머런의 뒤를 이어 수상인 된 테레사 메이(Theresa May)가 유럽연합 잔류파였음에도 불구하고 탈퇴파를 끌어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탈퇴파였던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을 외무부 장관에 앉혀야만 하는 불안한 ‘단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연합을 탈퇴하더라도 영국의 거대 자본의 원하는 단일시장에의 접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수용해야 할 터인데 이것은 브렉시트를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소동으로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경제적 실리를 취하기 위한 이러한 선택은 당의 극우파들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영국의 정치는 매우 흥미로운 실험무대가 될 것이다. 특히 극단적인 시장맹신주의가 파괴한 영국의 사회적 연대망과 기본서비스의 공공적 성격을 회복하려는 코빈의 노동당의 실험은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저항이 있을 것이고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전과 실험은 코빈이나 영국 노동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본의 논리, 자본이 만들어 내는 시간적 리듬과 공간적 배치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저항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이러한 저항의 몸짓이 무정형이라는 것이다. 단속적이고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템포로 나타나면서 엇갈린다는 것이다. 때때로 이런 저항의 집합적 표출에 의해서 출현한 좌파 정부들이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경도되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그리고 자주 자본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처럼. 민주주의보다는 돈의 힘이 더욱 강력한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코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에 맞서면서도 과거의 사회주의를 질식시켰던 권위주의와 협소한 계급정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정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급을 다시 정치의 무대로 불러 내오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미 결정된 것,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는 낡은 좌파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무정형의 불만과 저항을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 이름들이 호명되어지는 정치적 실천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포스트모던한 사회주의가 아닐까?

    필자소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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