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비판과 비평] 스티븐 제이 굴드의『풀하우스』를 읽고 ①
        2012년 08월 07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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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론이 날조라고?

    지난 12월과 3월 창조론 옹호단체인 ‘교과서 진화론 개정 추진회’(이하 교진추)의 요구로 인해 한때 교과부는 ‘말의 진화 과정’과 ‘시조새’를 생물학 교과서에서 제외할 것을 권장하는 해프닝이 연출했다.

    이 소식은 이명박 정부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제외하려는 것으로 국제학술지에([네이처] 등) 알려졌고, 이 일로 인해 한국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났다. 일련의 세속주의자들이나 민주적 교양이 넘치는 진보주의자들은 기독교 장로인 대통령께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과학 교과서에 강요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과학계에서는 진화론의 미시적 쟁점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과학 공동체의 논의를 제외하고 교과부가 일방적으로 지침을 내림으로써 과학의 자율성을 침해했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이 사태는 교과부에서 ‘말의 진화 과정’과 ‘시조새’를 교과서에서 제외해도 된다는 지침을 철회하고 과학계의 논의가 충분히 있은 후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소위 창조과학계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말의 진화과정이나 시조새의 문제를 갖고 ‘시비’를 거는 이유가 진화론을 부정하기 위한 것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들은 진화론에서 몇몇 취약한 점을 끄집어내거나 잘못 알려진 사례를 가져와서 ‘자 봐라! 너희가 주장하는 진화론이 순전히 날조된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주장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진화론이 잘못되었다는 신념을 줌으로써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교진추가 문제 삼고 있는 ‘일직선적인 말의 진화과정’이나 파충강과 조류강을 매개하는 화석으로서의 ‘시조새’는 과학계 일반에서 이미 신뢰를 상실했다. 이들 자료들은 과학적 근거가 굉장히 취약하고 진화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준다는 점이 과학계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니 교진추의 주장은 새로운 것도 아닌 해프닝일 뿐이다.

    도킨즈가 [지상최대의 쇼]에서 잘 보여주듯이 진화론은 명백하게 증명된 ‘과학 이론’이지 이런 저런 주장을 담은 ‘가설’이 아니다. 오늘날의 진화론은 통념화 된 단선적인 ‘말의 진화’나 ‘시조새’와 같은 화석이 없어도 진화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진화에 관한 증거는 넘치고 넘쳐 난다. 종교 근본주의자나 창조과학자들 같은 얼치기들만이 이들 자료를 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종교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학을 보호하고자 하는 세속주의자들이나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 자칭 ‘유물론자’들이 ‘교진추의 해프닝’에 대해 그렇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건 말 그대로 해프닝이자 아직까지 교정하지 않았던 것을 교정해야 한다는 매우 간단한 진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화론과 관련된 해프닝이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가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믿는 세속주의자들, 반기독교적 사고로 훈련받은 합리주의자들 내에서도 ‘잘못된 과학적 통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화론을 과학으로 믿고 있는 우리들조차 ‘진화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이라는 말이다.

    이 글은 작고한 세계 최고의 고생물학자 중 한명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가 쓴 [풀 하우스]에 대한 독서 노트이다. 이 책은 진화론에 대한 대중의 통념이 얼마나 비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지를 논박하는 저작이다. 더불어 이 책은 ‘교과서 진화론 추진회’가 교과서에 실린 말의 진화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의존하는 대표적인 저작이기도 하다.

    물론 굴드가 [풀 하우스]를 쓴 이유가 ‘교진추’처럼 진화론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진화론을 잘못된 통념으로부터 보호하고 더 굳건한 토대위에 세우기 위해 쓴 저작이다. 굴드는 과학이 겸손해야 함을 알고 있는 석학이었으며, 진화론의 가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옹호하고,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정확히 알도록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과학자이다. 더불어 그는 영성과 과학을 대립적인 것으로 두기보다 두 흐름이 상호 존중할 수 있기를 바라는 유물론자였다. 말하자면 그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부류의 과학자였던 셈이다.

    이 글은 비판이나 서평은 아니다. 필자는 그럴 처지가 못 된다. 내가 전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풀 하우스]에 대한 독서 노트를 쓰는 이유는,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이 갖고 있던 진화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상당부분 수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레디앙 독자들과 함께 그 내용을 공유하자는 취지인 셈이다. 물론 이 독서노트를 통해 레디앙 독자들 스스로 [풀 하우스]를 직접 읽어야겠다는 욕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진화에 대한 대중의 통념은 진화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화라는 말을 한자어 그대포 표현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앞으로 나아간다 함은 단순한 종에서 복잡한 종으로, 열등한 종에서 보다 고등한 종으로 진화가 이뤄진다는 사고방식을 일컫는다.

     이 말은 언뜻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35억 년 전 최초로 지구상에 등장한 생명체가 박테리아였지만 그 이후 지질연대를 거치면서 원핵생물이 진핵생물로, 단세포 생명체가 다세포 생물로, 어류의 시대에서 포유류의 시대로 생명의 역사가 변화해 왔다. 지질학적 시대가 진행될수록 신체기관의 분화가 더 복잡하고 신경체계가 보다 정교한 종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나중에 출현한 인류는 이와 같은 종의 진화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하다. 인류는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종이자 가장 크고 정교하게 분화된 뇌를 지는 영장류인 것이다. 언뜻 보기에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토대로, 종의 진화를 보여주는 자연사적 과정은 진보를 향한 변화라는 것을 당연히 하는 문화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를 진보로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도, 현재의 사실도 아니다. 진화란 최종 목적도 방향도 없는 변의 과정 그 자체이다. 진화란 종의 번식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성공한 종은 자손을 많이 번식한 종이다. 다윈 식으로 표현하면 ‘모든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191쪽) 번식이 진화의 목적인 셈이다.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전자가 개조되는 것이 진화이다.

    모든 생물종의 자손들은 부모 세대를 복제품처럼 찍어내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 세대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이든(소진화) 혹은 더 큰 변화이든(대진화) 변이를 일으키며, 이렇게 생성된 변이의 일부분은 다음 자손들에게 전달된다. 새롭게 생성된 유전적이 특질이 자식 세대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전달된 변이들 중 자연 환경에 가장 적합한 세대들은 더 번식하고 그렇지 않은 변이들은 소멸됨으로써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바로 자연 선택이다. 자연은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적응하는 변이도 특정한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다. 각각의 지역은 각각의 환경을 갖고 있고 생물종들은 이련 자연의 조건에 따라 그에 맞게 생태계에 적응하는 것이다. 큰 변이가 나타나 적응이 되면 그것은 새로운 종이 되는 것이다. 대진화가 바로 이를 지칭한다.(193쪽)

    자연에서 번식하기 위해서는 포식자(포식압)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이성을 잘 유혹해야 한다(이것은 짝짓기이다). 각각의 종들은 한편에서 환경에 잘 적응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성의 눈에 잘 띄도록 화려하게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둘은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이지만 진화는 이런 두 방향의 어디쯤에서 타협적으로 일어난다. 꿩처럼 수컷은 화려하고 암컷은 조잡하게 됨으로써 한쪽은 짝짓기에 유리하고 다른 쪽은 포식압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진화하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진화가 어떻게 나타나든 그것은 특정한 방향을 갖지 않는다. 유전자의 변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우연적인 적응을 보여주는 것일 뿐 어떤 본질적인 방향은 없다.(67쪽) 자식의 대에서 새롭게 나타난 변이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유리하면 그것이 자연선택이 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태가 번식에 유리하면 생명체는 특별한 변화 없이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간직한다. 실러캔스와 살아 있는 화석이나 악어와 같은 종이 그런 예다.

    도킨즈는 [지상최대의 쇼]에서 재미있는 비교를 제시한다. 지렁이와 원숭이의 비교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흔히 영장목에 속하는 원숭이가 지렁이보다 더 고등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고등동물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진화가 환경 적응과 종의 번식을 의미한다면 지렁이는 훌륭하게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종이다. 원숭이보다 개체수도 훨씬 많다는 점에서 원숭이보다 더 성공한 종이다. 원숭이나 인간이 포함된 영장목은 진화 과정에서 어쩌다가 출현한 하나의 종일뿐이다.(25쪽) 영장목이 더 우월한 종이라는 관념은 진화론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진화는 같은 종 내에서도 다양한 변이를 수반한다. 하나의 종은 같은 단일한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살게 되는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바다에서 육상으로 올라온 고래의 조상은 하마의 공통조상이기도 하다. 고래와 하마는 사실 4촌 쯤 된다.

    그런데 하마는 지상의 표면에 정착했지만 고래의 조상들은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둘은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듯 진화는 결코 단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변이가 아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함으로써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진화는 공통 조상 내에서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하면서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진화에 대한 이런 사고를 분지진화론이라고 한다.(93쪽) 진화는 사다리처럼 일직선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이를 동반하고 자손들이 분화되는 과정이며 그 와중에 생존하는 종은 지속적으로 자식을 번성시키고 멸종하는 종들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멸종은 진화적 사건에서 특별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며 매우 잦게 일어나는 일이다. 새로운 종의 출현도 마찬가지다. 변이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며 변이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와 진보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말의 진화과정은 수정되어야 한다

    “진화의 계통 가운데 가장 친숙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진화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있어도 누구나 “말”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에오히푸스(말의 최초 조상의 학명이다)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말(학명 에쿠스)에 이르는 단선적인 진화과정이 진화의 살아 있는 예로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 말의 진화는 ‘진화는 진보다’라는 관념을 정당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말의 진화는 5천 5백 만년간 지속되었다. 교과서에 실린 말의 진화는 대개 “에오히푸스-에피히푸스-메소히푸스-마이오푸스-메리키히푸스-플라이오히푸스-에쿠스”로 이어지는 깔끔한 단선적 진화로 묶여 있다. 이런 계통의 연속은 “진화를 진보로 표상”하는데 더 없이 유용한 자료가 된다. 에오히푸스에서 에쿠스에 이르는 진화과정에서 말의 발가락은 4개에서 1개로 변하고(이를 단지성이라고 한다.) 키는 연속적으로 커졌다. 어금니 치관도 높아지고 치관의 모양도 복잡해진다.(90쪽)

    <말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교과서 그림>

    이렇게 ‘구성된’ 진화과정에서 말은 더 크고, 더 우아하며, 더 아름답고 복잡하게 변화되어 온 종이다. 이런 관점은 전형적인 ‘향상 진화’의 입장으로써 말 속은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단계적으로 진보해온 것이다. 이런 진화는 사다리, 연쇄, 선형성과 같은 다양한 비유법을 통해 진보로 각색된다.(93쪽) 말의 진보를 이렇게 구성할 경우 진화가 마치 어떤 방향을 향해 움직여 간다는 인상을 주기에 딱 알맞은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말은 이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말의 진화과정은 여타 진화과정처럼 다양한 변이들로 가득 찬 역동적인 종 분화의 산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말은 진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표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말은 진화에 실패한 대표적인 종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 말속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브루스 맥퍼든의 진화 계통수이다.(98쪽)

    그에 따르면 마이오세기 1천만년 동안 말은 무려 30개 종의로 분화했다고 설명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메리키히푸스 이후 1천만년 동안 종 분화가 30여개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 실린 말의 진화과정은, 마이오세 1천 만년 동안 메르히키푸스-플라이오푸스-에쿠스에 이르는 연속적인 세 계통의 진화만 서술하고 있다. 30개 종을 단순히 3개 종으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진화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신화적 사고인 셈이다.

    더군다나 말은, 자기 조상이 태어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멸종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에쿠스만 살아남았다. 2절에서 썼듯이 진화가 종의 다양성의 증대와 자손의 번식을 의미한다면, 말은 단 한 계통만 살아남았고, 다른 모든 계통은 멸종했다는 점에서 진화에 실패한 대표적인 종인 셈이다.

    진화에서 가장 실패한 종을 진화의 표본으로 제시하는 것을 두고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명에 대한 작은 농담’이라고 말한다. 사실 포유류 중에서 진화에 가장 성공한 종은 설치목(쥐와 그 4촌들)이거나 우제목(사슴류)이다. 그러나 이들의 진화는 더 크고 더 아름답게 진화한 것이 아니다 보니 진화를 설명하는 표본에서 제외되는 게 일반적이다. 쥐를 진화의 표본으로 내세운다면 ‘진화는 볼품이 없어진다.’ 진화를 진보로 그리려다 보니 얼토당토않게 말의 진화가 교과서에 실린 것이다.

    과학은 오류를 수정하는 연구 프로그램이다

    진화론은 옹호하려는 세속주의자들이라면 말의 진화가 날조되었다고 비판하는 얼치기 창조과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열 받을 필요 없다. 우리는 쿨 하게 말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덧붙여 창조과학 옹호자들에게 더 풍부한 말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면 된다. 물론 이렇게 설명한다고 그들이 들을 사람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원래 과학은 중심적인 연구 프로그램 속에서 여러 주변적 가설들이 존재하고 이런 가설들을 검증하며 발전한다. 임레 라카토스식으로 말해서 과학은 연구핵을 중심으로 다양한 가설들을 검증해 가는 연구프로그램이다. 특정한 연구핵은 가설의 형태로 미래를 예측하고 실험을 통해 이를 검증한다. 연구핵이 올바르다면 그 주변의 가설들의 오류는 끊임없이 수정될 수 있다. 하나의 가설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이 연구 프로그램 자체가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2절에서 설명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변이가 진화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것들 가운데 제대로 된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많다. 다음 글에서 보이겠지만 19세기 진화론은 과학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서구 백인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와 같은 진화주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대부분 치유되었다.

    말의 진화과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말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데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고 해서 진화론을 폐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 주장은 과학적 연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의 편견일 뿐이다. 말의 진화과정은 새로운 증거를 통해 논박될 수 있으며 이런 논박이 타당하다면 새로운 가설을 통해 진화론의 프로그램을 정교화하면 되는 것이다. 진화론은 실제로 그렇게 발전해 왔다.

    오히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말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교과서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과학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주장에 집착한다면 우리 또한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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