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개혁주의적 개혁을 제안한다"
    [새책] 진보적 정책대안 217가지…작은 변화에서 신뢰, 동의 쌓아야
        2012년 04월 27일 09: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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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적 지식인들의 학술단체인 ‘학술단체협의회’가 지난 2011년 한국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위한 정책 대안으로 『위기의 한국사회, 대안은 지역이다』를 펴낸 이후 『217, 한국사회를 바꿀 진보적 정책 대안』(학단협, 조돈문 등 엮음. 메이데이. 25000원)을 출간했다.

    이번 책에는 52명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안하는, 경제/기업/고용 ·노동/비정규직 노동/공간 ·환경/복지/법질서/정치 ·외교/남북관계/초중등교육/대학교육/역사/문화 · 여성 ·가족/언론 ·정보 등 14개 영역에서 217가지 진보적 정책대안을 담고 있다.

    이러한 14개 영역에서의 217가지 정책대안은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혁 전망 그 자체를 정리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엮은이인 조돈문 교수는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으로 개념화한다.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은 사회변혁을 지향하되 작은 변화들을 축적하며 지배질서의 근간을 타격하고 변혁 주체의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 전략이다. 대안체제에 대한 신뢰와 동의는 구조적으로 결정되거나 지배질서에 대한 불만에 의해 자동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에 대한 신뢰와 동의가 축적되어야 가능하다.”

    다음은 이 책을 기획한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인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가 쓴 『217, 한국사회를 바꿀 진보적 정책 대안』의 머리말이다. – 편집자주

     

    책 표지

    우리는 다른 세상을 원한다. 물론 세상은 구호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며 치밀하고 체계적인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문제제기 집단을 넘어서

    민주항쟁과 노동자투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지 4반세기를 거치며 민주화는 다소 진전되었지만 민중의 삶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수반되지 않음으로써 민주주의 심화는 발목 잡히게 되었고, 뒤이은 이명박 정부는 정치적 민주화의 성과마저 되돌려 놓았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의 3대에 걸친 신자유주의 패권은 자본계급의 시장독재 이데올로기를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사회적 부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신자유주의 15년은 시민들의 정치사회적 보수화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 패권에 맞서 민중은 가열찬 투쟁을 전개했지만 사회적 고립을 면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은 민중투쟁과 함께 사회변혁을 시도했지만 세상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문제가 부각되어 의제화되는 데는 진보진영이 크게 기여했지만 문제 해결을 둘러싼 담론에서 진보진영의 대안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진보진영은 문제제기 집단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웠고 정책대안은 보수주의와 중도 자유주의의 양분 구도 속에서 선택되어왔다.

    지금도 외적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권력은 여전히 보수주의 세력과 중도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분점되고 있고, 그들이 구축한 신자유주의 대동맹과 보수 언론은 진보적 대안에 대한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정치세력화에 실패했고 사회적 고립 속에서 민중투쟁을 주도했던 대중조직들은 이제 투쟁 동력마저 상실해 가고 있다. 정치사회의 역학관계에 걸맞지 않은 거대 변혁담론은 국민적 설득력은 고사하고 내적 동원에도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

    민중들조차 변혁적 대안을 수용하기 꺼리는 것은 의식의 보수화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현실적 조건과 대안의 유효성에 대한 합리적 판단에도 기인하는 것이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 유일체제 이데올로기의 공세와 뒤이은 신자유주의 패권 하에서 현실적 준거를 상실한 대안체제 구호는 신뢰를 얻기 어렵게 되었다.

    진보진영은 거대 변혁프로젝트를 추진, 실현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고, 새로운 사회체제는 구체성과 이행 프로그램을 결여함으로써 미래의 불확실성과 함께 위험 부담을 증대시켜 상당한 이행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전략적 접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우리는 ‘비개혁주의적 개혁(non-reformist reform)’ 전략을 제안한다.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은 사회변혁을 지향하되 작은 변화들을 축적하며 지배질서의 근간을 타격하고 변혁 주체의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 전략이다.

    대안체제에 대한 신뢰와 동의는 구조적으로 결정되거나, 지배질서에 대한 불만에 의해 자동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에 대한 신뢰와 동의가 축적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브라질 노동자당이 지역사회 수준에서 작은 실천들의 성과를 통해 변화에 대한 신뢰와 동의를 축적한 다음 참여예산제를 실행하면서 진보적 통치모델과 진보진영의 통치역량에 대한 신뢰를 확보함으로써 노동자당의 집권을 이루어낸 경험은 좋은 귀감이 된다.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좌파집권 붐의 경우 민중들의 계급투표가 신자유주의 폐해에 대한 불만보다 집권 좌파정권의 실천 속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는 점은 민중들의 신뢰와 동의를 얻는 것이 지난한 실천의 결과로 가능함을 잘 보여준다.

    2012년 선거 국면과 진보적 의제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을 시도하는데 2012년의 선거 국면과 이후 시기는 더 없이 좋은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선거 국면은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대중주의 레토릭을 차용함으로써 담론의 급진화가 진행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진보적 과제들을 정치적 의제화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된다.

    특히 중도 자유주의 세력의 이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권한 자유주의 세력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되고, 민중의 세력화 및 직접민주주의 진전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실권한 보수주의 세력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권한 자유주의 세력은 민중과 서민의 대변자인 양 진보적 레토릭을 사용하며 집권 보수세력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집권한 보수주의 세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2012년 4월 총선은 중도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내 다수당 세력인 보수주의 세력에 도전하는 구도로서 중도 자유주의 세력이 야당인 동시에 소수파 정당으로서 진보적 의제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급진적 담론을 전개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미 복지제도, 재벌규제 및 비정규직 문제 등에서 상당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이번 총선은 중도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내 제1당이 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더 높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자유주의 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하게 되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권력을 탈환하려고 박차를 가할 것이며, 이를 위해 19대 국회가 개원하면 총선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도 자유주의 진영 내에도 진정성을 지닌 인사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도 자유주의 정당 자체는 집권을 향한 집합적 권력의지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압박과 견인이 요구된다. 그 점에서 진보진영은 양대 선거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중도 자유주의 세력은 보수주의 세력에 맞서 총선과, 특히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진보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절실히 갈구할 것이다. 도전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는 선거 국면에서 의제의 급진화에 힘을 더하게 되고, 진보정치세력이 19대 국회 내 진보적 의제들의 법제화 공약을 실천하게 한다면 진보진영의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진전될 수 있다.

    이렇게 2012년 양대 선거와 뒤이은 정치사회의 동학은 의제의 급진화와 진보적 과제의 실현을 통해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이 현실세계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양대선거에서 드러날 진보정치세력의 위력과 차기 정권하 민중진영의 동원역량과 ‘영향의 정치(politics of influence)’ 능력이 주요한 변수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촛불과 박원순․안철수 현상은 시민들이 변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보수정당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정당에 대해서도 상당한 불만과 불신을 지니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진보적 레토릭으로 집권한 다음 보수화되며 공약을 저버린다면 국민적 불신은 회복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비등하며 자유주의 정권에 맞서 촛불이 점화하고 시민사회가 더욱 급진화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단계적 접근과 중단기적 의제

    이 책은 사회변혁의 즉각적 실현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지향하되 선거국면에서부터 의제화할 수 있는 중단기적 과제들을 중심으로 현재적 조건과 함께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다.

    진보학계 연구자들이 이제껏 주로 특정 주제에 대한 전문학술저술의 집필에 치중해왔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지향하는 사회변화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되며 그 실천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왜 그러한 변화에 신뢰를 보내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책의 논의들이 어쩌면 필자들이 지향하는 다른 세상의 모습과 일견 배치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반한 모순 투성이의 자본주의 체제 위에서 사회변혁의 로드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체제는 평등사회이다. 하지만 이 책은 계급없는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자본계급의 존재를 인정하며 재벌을 규제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소유체계의 변혁을 지향하면서도 자본지배의 생산관계 속에서 복지제도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하며, 비정규직 없는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정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용보험제도를 확충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우리는 이러한 작지만 유의미한 변화들을 통해 지배질서의 근간을 조금씩 허물어가는 동시에 주체 형성을 위한 조건을 조성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렇게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을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뿐만 아니라 왜소한 진보정당의 존재감, 낮은 노동조합 조직율과 민주노조운동의 취약한 영향력 등 현실적 조건은 비개혁주의적 개혁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데도 더욱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민주노총은 파견노동 철폐를 구호로 외치고 있지만, 계급적 역학관계와 정치사회 구도에 비추어 보면 파견노동 철폐의 실현은 요원한 과제로 판단된다.

    그래서, 이 책은 파견노동을 포함한 비정규직의 활용을 특정한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만 허용하되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간접고용의 경우 사용 인센티브를 최소화하는 접근법을 택했다. 비록 작고 미흡한 변화로 보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민중들의 삶의 조건은 유의미하게 개선되며 더 큰 사회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사회적 동의가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사회변혁의 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2010년 말 학술단체협의회가 기획하여 소속 연구단체들과 소통하며 2011년 상반기에 주제와 필자를 확정한 다음 10월 29일 “2012,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과제와 대안”라는 제목으로 연합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발제 원고들을 수정보완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주제 설정, 발제와 토론, 원고의 수정보완 및 출판에 이르기까지 명실상부한 학술단체협의회와 소속 연구단체들의 집합적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논의한 의제들의 실현 과정과 사회정치적 행위자들의 역할을 지켜볼 것이며, 중단기적 과제들로부터 우리가 지향하는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로드맵과 이행전략에 대한 고민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필자소개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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