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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은 별 관심이 없다
    [왼쪽에서 본 F1] F1의 주인 바뀌다
        2016년 09월 19일 09: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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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F1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의 대형 미디어 그룹인 ‘리버티 미디어’가 기존 F1 소유주였던 CVC로부터 F1 지주회사의 주식 지분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F1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아직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18.7%의 지분 인수를 완료한 리버티 미디어는 앞으로 천문학적인 규모인 총액 80억 달러 규모의 인수를 단계적으로 진행해 F1의 새로운 주인이 될 계획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사업체’로 설명할 수도 있는 F1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다른 기업의 오너가 바뀌는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리버티 미디어는 F1 인수와 함께 회사의 이름을 ‘포뮬러 원 그룹’으로 바꾸며 자신들의 정체성까지 수정하려 하고 있고, F1 인수 후에는 기존 방송 시스템과 디지털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F1의 홍보와 배급에 공을 들일 것이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6년 F1을 인수했던 기존 소유주 CVC가 단순한 투자 자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디어 기업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리버티 미디어 그룹의 F1 인수는 긍정적인 소식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적어도 투자를 해서 수익을 뽑아내야 했던 투자 자본, 혹은 투기 자본과는 접근이 다를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버티 미디어 그룹 역시 자신들의 F1 인수를 그룹의 장기적인 비전과 연결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리버티 미디어의 F1 인수가 이야기하는 장밋빛 미래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일단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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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인 2006년, F1 드라이버들의 기념 촬영

    사실 지난 10년간 CVC의 F1 지배는 여러 면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F1과 어떤 가치도 공유하지 못하는 투자 자본이 F1을 소유한 이후, F1의 모든 것이 돈의 논리로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F1의 총매출과 순이익이 크게 증가했고, CVC는 엄청난 배당금을 챙겨갔습니다. 그 사이 중소형 F1 팀들의 경제 사정은 날로 어려워졌고, 팬들은 돈만 밝히는 F1 소유주의 운영 방향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F1에 스포츠로서의 가치는 크게 희석됐고, 사업으로서의 가치만 남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F1을 실질적으로 이끌며 ‘F1 수프리모’로 불리던 버니 에클스톤은 CVC의 입장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려고 F1에 투자했고, 그 목적대로 투자금을 회수했을 뿐이란 얘기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CVC는 매년 많은 배당금을 가져간 것은 물론, 리버티 미디어에 지분을 매각하면서 막대한 차익도 거두게 됐습니다. 게다가 앞으로도 리버티 미디어의 이사회에 임원을 등재시켜 적게나마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CVC의 입장에서는 투자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입니다.

    지분 매각으로 CVC의 영향력이 줄어든 뒤에는 ‘사업’으로서의 가치보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리버티 미디어는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가치와 장기적인 투자에 익숙한 만큼, 단기적으로 수익을 뽑아내려던 CVC와는 다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리버티 미디어의 주장대로 F1은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발 더 물러나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리버티 미디어의 F1 인수가 상황을 180도 전환시키리란 바람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투자 방법과 방향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리버티 미디어 역시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대기업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CVC가 그랬던 것처럼 리버티 미디어도 막대한 투자금을 어떻게든 회수하려고 들 것입니다. CVC보다 약간 더 많은 시간을 줄지는 모르지만, 수익 창출이 불투명한 장기 투자에 헌신적으로 내놓으려는 것이 아닌 이상 (80억 달러를 투자하며 수익 창출을 노린다는 ‘대기업’이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F1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최대한 좋지 않게 바라본다면 미디어의 힘을 이용해 F1을 더 인위적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탈바꿈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듭니다. 대형 미디어를 이끄는 자본이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에서, 첨단 기술 개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F1이 미디어의 손길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 미디어가 스포츠의 소유주라면? 장밋빛 미래보다 우울한 디스토피아가 더 가깝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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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의 소유주였던 CVC의 도널드 맥킨지와 F1 ‘수프리모’ 버니 애클스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걸까요? 제 걱정이 기우일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F1 인수의 주변 상황 전개를 천천히 뜯어보면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리버티 미디어를 이끄는 존 말론은 세계 최고의 부동산 재벌 중 한 사람이자, 루퍼트 머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몇 안 되는 미디어 업계의 큰손 중 하나입니다. 미디어를 순전히 사업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는 면에서 머독과 말론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에서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을 때 머독이 말론을 견제하기 위해 애썼을 정도로, 말론은 어떤 면에서 머독 못지않은 미디어 자본의 폐해를 대표하는 사례 중 한 명일지 모릅니다.

    게다가 새로 F1 회장으로 임명된 체이스 캐리는 말론의 사람이면서 얼마 전까지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의 핵심 인물이었던 사람입니다. 말론이나 머독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사업가’가 F1의 회장직을 맡게 된 이상, F1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버니 에클스톤이 과도기 3년 동안 CEO 역할을 계속하게 됐지만, 적어도 모터스포츠와 함께 평생을 보낸 모터스포츠인 에클스톤이 사업가 캐리를 마음먹은 대로 조종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버니 에클스톤이 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과거의 F1을 그리워하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얘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버니 에클스톤의 분석은 여전히 냉정합니다. 에클스톤은 CVC와 마찬가지로 리버티 미디어도 돈을 보고 F1을 인수했고, F1의 사업 방향에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고 예상했습니다. 자주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하는 에클스톤이긴 하지만, 가끔씩 정곡을 꿰뚫는 정확한 분석을 내놓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후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바로 그 부정적인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망입니다.

    따지고 보면 리버티 미디어가 얘기하는 장밋빛 미래를 순진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본이 철저히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사업으로 소유한 스포츠의 가치와 스포츠 정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대부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와 관계없이 자본은 사람의 사정을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그런 사정을 생각해줄 인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리버티 미디어의 이사회가 온통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더라도, 결국 이런 대자본이 선택하는 방향은 단 하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쪽’뿐입니다.

    결국, 스포츠의 가치와 스포츠 정신을 지키는 것은 이 스포츠에 영혼을 바친 관계자들과 팀원들, 그리고 팬들의 몫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소유주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여 소유권에 대한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스포츠의 정신이 가능한 많이 지켜지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인격적인 실체가 없는 자본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견고한 시스템을 당장 허물지는 못하더라도, 사람 사는 세상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는 운동가와 시민들이 그런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나가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스포츠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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