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인칭, 기억과
    증언을 위한 반(反)기념비
    [아트 살롱] 기억과 망각의 투쟁
        2016년 09월 17일 02: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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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예술잡지 <B-art> 42호에 실린 글을, 잡지의 허락을 받아 필자가 수정하여 기고한 글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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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6일 김인환의 <생명전: 세월호 이야기>라는 전시가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열렸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검고 붉은 이미지 다발이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미지 다발 가까이로 가면, 각종 매체들이 기록한 세월호의 기억들이 종(縱)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신문 글귀에는 붉게 밑줄을 쳐두었고, 어떤 보도사진은 프레임 주변을 검게 칠해두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한 줄 한 줄 글과 이미지를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수집한 신문의 정보량이 많아서 그렇기도 했고, 세월호의 상처가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림을 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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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두 김인환 생명전: 세월호 이야기>전시장 내부사진

    전시를 소개한 리플렛에 김인환은 생명을 주제로 작업을 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림 줄기의 맨 꼭대기에 백두산이 있고, 그 아래에 천제단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천제단 아래로 세월호 사건이 연대기 순으로 핏물처럼 흘러내린다. 새들은 세월호의 흩어진 생명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저 시간의 물줄기를 정녕 거슬러 올라갈 순 없을까. 이미지를 거꾸로 읽으니 그림을 장식하고 있는 수천의 새들이 비극을 구조해서 승천하는 천사처럼 보인다. 줄기 하나하나가 솟대 같기도 하다. 이미지가 연출하는 비극을 승화시키려는 본능적 반응일까.

    이미지 가닥의 시작과 끝을 이으면, 끝없이 반복되는 비극의 원환이 된다. 역사적 원환이 연출한 악무한이든, 몰락이나 구원에 이르는 직선의 시간이든, 한 올 한 올의 이미지들이 전시장에서 비극사(시간)의 타래가 되어 있다.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다시 보니 단순히 사건의 연대기적(chronic) 나열만은 아니다. 사건의 줄기를 횡(橫)으로 읽으니, 서로 다른 매체가 보도한 사건들이 동시간(synchronicity) 안에서 서로 경합하고 있었다. 지상최대의 구조작전이라고 말하던 어느 매체와 그 신문을 향해 욕설을 하던 또 다른 매체들의 경합이 연출되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르게 떠들어대고 하나의 과장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덮던 시간, 이야기를 덮은 파렴치함에 치를 떨고 분노하던 시간이 다시 생각났다. 관객은 하나의 줄기와 다른 줄기가 서로 충돌하는 변증법적 긴장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통시적 축(x)과 동시적 축(y)이 세월호라는 좌표점을 형성한 채 관객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내 가늘고 긴 바늘 하나가 관객의 심장 속으로 지며리 파고든다. 가위에 눌려 숨 쉴 수조차 없었던 지난밤의 어둠이 떠올랐다.

    어둠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법이다. 그러나 매체는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어둠도 진공포장 해버리는 재능(災能)이 있다. 물론 팔리는 비극에도 유통기한은 있다. 기한이 다한 비극은 이내 새로운 상품들로 덮인다. 비단 빼기로서의 삭제뿐 아니라, 덮기로서의 삭제는 매체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범람하는 말, 범람하는 이미지들이 어느새 새로운 말과 이미지로 바뀐다. 예전 용산처럼, 화려하고 매끈하게 선전된 수천의 외피들이 거친 비극을 순식간에 신상(Brand new)으로 갈아치우려 했다. 그러나 용산은 현재 죽은 물고기처럼 허연 배를 드러내고 뒤집어져 있다. MB가 생산한 수천의 파국이 현 정부의 파국으로 변주된 것 중 하나가 세월호 사건이다. 덮기로 삭제의 재능을 발휘하던 매체는 이제 무관심으로 사건을 누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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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작품 이미지 중 하나

    작가는 배 안을 뽀얗게 덮은 뉴스의 먼지들, 덮기로서의 삭제를 꼼꼼히 닦아내, 관객을 기어이 물 속 아이들의 네모진 시선 앞에 다시 세우고 만다. 여태 이미지의 창으로 가슴조리며 배안을 바라보는 줄 알았더니, 정작 이미지의 시선은 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배안에 갇힌 를 바라보는 형국이거나 가 희생자가 되어 배안에서 배 밖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비극의 줄기 한 칸 한 칸은 마치 영화의 필름 한 컷 한 컷처럼 세월호의 창을 은유하고 있었다. 는 그 창의 바깥에 있기도 그 창 안에 있기도 했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창 앞에 소환되어 있었다.

    작가는 관객이 비극을 소비하지 않도록, 싸구려 상업적 체험이 비극을 덮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기억을 구조하고 있었다. 전시는 마치 문신을 하듯, 관객에게 기억을 새기고 애도를 촉구하고 있었다. 이 전시는 비극의 ‘기념비’였다. 무엇이 그의 붓을 들게 했을까? 역사적 좌표 위에 자리 잡은 수많은 비극들, 그 속에서 원치 않은 과녁이 되어 스러져 갔던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하는 무언의 압력이라도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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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작품 이미지 중 하나

    아직도 완료(애도)되지 못한 비극은 우울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 애도에 대한 무언의 압력,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사건을 애도로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던 것일까? 전시는 새로운 기념비가 되어 압박을 승화시키고 있었다. 이제 그의 생명전은 기억과 증언의 정치학과 연결되어 생명정치가 된다. 아우슈비츠 사건에 대한 증언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레비는 결국 그 증언을 완수하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삼켜졌었는데, 작가는 어쩌려고 감히 이 일을 감당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의 증언은 누구의 말인가? 그의 말인가? 희생자의 말인가? 유가족의 말인가? 미디어의 말인가? 애타는 관찰자의 말인가?

    4인칭, 비극에 잠식당한 우울을 극복하려는 의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예전에 들었던 4인칭 화법이 생각났다. 쓰시마 유코의 소설 <나>는 아이누의 구전에 영향을 받아 4인칭 화법을 구사한다. 4인칭은 샤먼의 화법이자, 샤먼의 계보에서 흘러나온 구전문학 특유의 인칭대명사이다. 아이누의 구전은 당시 정치권력에서 추방당한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들은 비참하게 죽은 뒤에 다양한 신이 되어 되살아나게 되는데, 쓰시마는 이러한 화법을 소설에 도입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제 몸에 담아 이야기하는 배우의 말이 4인칭 화법일 수 있겠다.

    4인칭 화법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인물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대신해서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옮겨가는 식이다. 이렇게 4인칭은 날개를 단 것처럼 자유롭게 인물에서 인물로 날아다니는 화법이다. 결국 수많은 (다양체)가 각기 자기 말을 하는 ‘동시발화’가 이 전시의 화법, 증언의 인칭대명사였다. (동시발화는 일치되거나 화음을 가진 발화가 아닌, 제각기 자기 말을 동시에 외치는 합창 같은 발화를 말한다. 축제 때 제각기 동시에 자신의 소리와 말로 함께 환호성을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4인칭은 비극에 잠식당한 우울을 극복하려는 의지, 그래서 기어이 애도가 완수되기를 바라는 작가-관객의 말하기 방식이다. 그의 생명전이 애도의 기념비가 되고, 생명의 정치의 힘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나, 그리고 전시에 참여한 사람들은 마치 접신한 무당의 혼종된 인격처럼 복잡한 비극을 담아내고 증언할 수밖에 없다. 무병(巫病)을 앓는 무당의 심정으로 관객은 미디어의 헛말과 헛 이미지로 덮인 먼지를 지우고 닦아내어 기어이 비극 앞에 선다.

    전시장 한 가운데서 한참을 떨고 진동하다, 전시장을 나섰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전시장을 돌아보니, 전시장의 검고 붉은 물줄기가 마치 물이 새는 배 안의 풍경 같다. 다시 가슴이 먹먹하다. 는 배를 버리고 떠난 그 사람일까? 아니면 미처 구조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침몰하던 배를 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구조자일까? 는 다시 극심한 무병을 앓는다. 단원고 교감 선생님의 자살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 감히 서고 싶지 않지만, 다시 설 수밖에 없는, 아니 다시 서게 만드는 압도적 비극. 세월호와 같은 수천의 압도적 비극은, 외면한다고 외면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결되지 않은 비극을 화석화시키는 기존의 형식적 기념비로 애도를 완성하거나 증언을 완성했다고 선언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할 기억과 내가 할 증언을 돌로 굳은 기념비에 간단히 떠넘겨서는 안 된다. 증언과 기억은 일상 이면에 도사리다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는 옛 비극을 함께 막을 수 있도록, 늘 촉구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화석화된 기념비에 반대하는 반 기념비

    반 기념비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비극을 추념하고 더 이상 기억을 촉구하지 않는 기존의 화석화된 기념비에 반대해서 구상된 기념비이다. 함부르크의 게르츠 부부(Gerzes), 베를린의 노버트 라데마허(Norbert Rademacher), 호르스트 호하이젤(Horst Hoheisel) 같은 독일의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기념비들이 관람자에게 값싼 위로를 제공하거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손쉬운 속죄나 보상으로 역사적 책임을 면하게 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기억의 기능을 내장한 기념물들이 오히려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를 냈던 데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기념물이 기억 작업을 대신하므로, 일상에서 기억해야 할 그 기억을 사람들은 쉽게 잊고 지낼 수 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기억하려는 기념비의 강렬한 의지는 의도치 않게 그에 상당하는 망각의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기념물에 불만을 품었던 게르츠 부부는 기념물을 서서히 사라지게 함으로써, 관객의 내면에 기억을 심는 방법을 택한다. 부재해가는 기념물 앞에 기억하기를 독려 받는 관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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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헨과 에스거 게르츠 부부,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가 세월이 지남에 다라 점점 사라지는 모습. 반기념비의 전형적 사례 중 하나.

    베를린의 노버트 라데마허는 이전의 강제수용소가 있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운동장이 되어 담벼락만이 강제수용소의 흔적을 기억하는 장소에 빛 감지 센서를 설치했다. 그래서 보행자가 빛 감지 센서에 발이 걸리면 고광도의 슬라이드 프로젝션이 켜지면서, 담벼락에 그 장소에 얽힌 과거의 구체적인 역사가 텍스트로 펼쳐진다. 보행자는 기억의 요구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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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이 만든 아슈로트 분수를 복원했지만, 그 분수를 새롭게 기념하기 위해 원래의 분수를 땅 속으로 거꾸로 박은 네거티브 형태의 기념물을 만듦, 기념물이 박힌 땅 속으로 지하수가 흘러들게 한 형태의 반 기념비

    카셀시에는 예전에 유대인들이 돈을 모아 세웠던 아슈로트 분수(Achrott Brunnen)가 있었다. 그런데 이 분수는 나치 때 독일인들이 파괴해버린다. 카셀시가 이를 복원하려고 했을 때, 호하이젤(Horst Hoheisel)은 네거티브형태의 기념물을 제안한다. 즉 분수가 있던 자리에 1908년의 모양을 한 12미터의 고딕 피라미드 분수를 거꾸로 땅에 박아 넣는 디자인이었다. 그렇게 뒤집힌 텅 빈 피라미드의 내부로 물이 흘러들어가게 함으로써, 기념비는 비극사를 기억하는 거대한 기억의 깔대기가 될 것이었다. 이 기념비는 부재를 부재로 표시함으로써 부재를 기억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 세 작업은 모두 ‘기억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도록 남겨진 또는 촉구된 관람자만 남겨놓는다. 사라진 기념물은 대신 사람들에게 기억하라고 그리고 증언을 위해 일어서라고 요구한다.

    세월호 사건 같은 비극 역시 화석화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끝난 사건도 아니지 않나. 그러니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몸을 빌려서라도 증언에 이르러야 한다. 김인환은 스스로 샤먼이 되어 사건을 증언했다. 김인환의 전시는 그런 점에서 4인칭의 화법의 기념비가 되었다. 4인칭의 전염성은 관객에게도 미친다. 현재의 우울과 미완의 애도 사이에 선 사람들에게 이제 남은 건, 리좀이 된 4인칭 ‘’가 생성시킬 증언의 연대이다. 증언으로 연대를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김인환의 전시는 반 기념비와 유사하다. 비단 반 기념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다양한 문화 매체와 콘텐츠들이 비극의 기억을 촉구한다. 세워호를 기억하려는 일련의 문화 매체들은 그런 점에서 4인칭 화자의 증언의 연대이자, 문화의 장에 등장한 새로운 반 기념비가 된다.

    비극을 제대로 떠나보내지 않으면, 우울은 질병이 되어 우리(사회)를 삼키고 말 것이다. 비극은 곰팡이 포자처럼 퍼지고 도질 것이다. 하지만 슬퍼하기에는 이르다. 반기억의 기념비 역시 도처에서 기억을 촉구하는 포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인환의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처럼. 기억과 망각의 투쟁이 역사와 정치의 장을 넘어 문화의 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망각을 촉구하려는 힘, 성급한 화해로 서둘러 비극을 매장하려는 힘, 새로운 증언으로 진실을 인양하려는 힘들이 문화의 장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애도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진실은 인양되어야 함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인양된 진실은 새로운 증언과 기억을 촉구시킬 수 있어야 한다. 기억을 화석화시키는 기념물이 아니라, 기억을 새롭게 촉구하는 반(反)기념물이 필요하다. 증언과 기억이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문화 자체가 비극의 역사를 구조하기 위한 인류의 반기념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증언(전시)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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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작품 이미지 중 하나

    P.S. 이 글이 처음 작성되었던 당시, 명예졸업을 시켜주겠다던 단원고 아이들은 제적되었고, 부산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공감 그리고> 2016년 vol.20 봄호 중 세월호 사건이 언급된 글은 저자와 상의 없이 인쇄소에서 세월호 부분을 임의로 삭제한 채 발행되었다. 그리고 문화재단은 사과와 함께 <공감 그리고> vol.21 여름호에 원문을 그대로 다시 실었다.

    필자소개
    예술잡지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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