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수, ‘친일 행적’과 ‘문학적 성과’ 사이
    [책소개]《이광수, 일본을 말하다》(하타노 세츠코/ 푸른역사 )
        2016년 09월 10일 05: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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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문학상’을 둘러싼 해프닝

    2016년 8월 2일, 한국문인협회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인 춘원의 《무정》 발표 1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맞아 한국 근대문학의 대표 문인 두 사람의 문학정신을 발굴. 계승한다는 취지다. 문효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은 문학상 제정에 대해 “친일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그들의 문학성까지 매몰돼선 안 된다”, “우리 문학의 여명기에 공헌한 사실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6년 8월 4일, 역사정의실천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기자회견을 열어 “춘원과 육당은 온 민족의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해준 하늘이 준 재능을 민족 반역의 길에 내다버렸다”면서 “한국문인협회는 ‘친일 문학상’ 제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문학계 안팎의 거센 역풍을 맞은 한국문인협회는 갑작스럽게 발표했던 이 문학상 제정 계획을 며칠 만에 갑작스럽게 철회한다. “당초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문학적 업적을 기린다는 순수한 차원에서 이 상을 제정하고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었으나, 문단 안팎에서 그들의 문학적 성과보다는 친일 문제를 중점 부각함으로써 이 상의 기본 취지가 크게 손상됐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삶과 문학이 놓인 자리 복원하기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광수만큼 서로 모순되고 대립하는 다양한 계기들을 껴안은 채 한국 근대사를 관통해온 작가도 드물 것이다. 따라서 이광수의 삶과 문학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 모순과 대립의 계기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일본어 원서 《이광수-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韓國近代文學の祖と〈親日〉の烙印》, 中央公論新社, 2015)는 일본어 번역서 《무정》(2005)을 비롯하여 《무정》을 읽는다》(2008), 《일본 유학생 작가 연구》(2012), 《이광수의 이언어 창작에 관한 연구》(근간)에 이르기까지 이광수 연구에 집중해온 니가타현립대학의 명예교수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의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광수 평전이다.

    저자는 자료에 기초해 그간 묻히거나 망각되었던 역사적 맥락을 최대한 복원하면서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이광수의 삶과 문학이 놓인 자리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친일’인가 ‘문학성’인가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일본’이라는 키워드로 이광수의 삶을 가감 없이 그리는 이 책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어온 우리 사회의 이광수에 대한 해묵은 논란을 되돌아보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본’, 이광수를 이해하는 키워드

    이광수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오래 기억돼온 이유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어로 창작하고 솔선해서 창씨개명을 했으며 태평양전쟁 말기 학병 권유 강연에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친일親日’ 작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이광수에게는 항상 ‘친일’이라는 단어가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다. 다이쇼大正시기 와세다대학에 유학한 이광수는 민족을 계몽하기 위해 많은 논설을 쓰고, 장편소설 《무정》을 집필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전에는 도쿄에서 〈2.8조선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그 후 망명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다. 민족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 말기 이광수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민족 반역자’로 지탄받는다.

    이광수의 삶에 일본이 끼친 영향

    이광수는 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을까.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근대에 희롱당한 식민지 작가 이광수는 항상 일본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인물의 생애에 일본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광수는 조국을 삼키려 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원동력을 ‘욕망’이라 갈파하고, 쇠퇴한 민족을 재생시키려면 자신들도 ‘욕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이지 시기와 다이쇼 시기에 걸쳐 일본에 유학한 이광수의 눈에 일본은 어떻게 보였을까. 이광수에게 일본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 책은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광수의 생애를 더듬은 것이다. 동시에 그의 삶을 통해 과거의 일본을 응시한 것이기도 하다.

    이광수

    이광수를 만든 몇 가지 계기들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는 것은 ‘힘’

    1905년 여름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도착한 소년 이광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벽돌로 지은 서양 건축물이었다. 한성의 남대문역 주위는 초가집뿐이었던 무렵이었으니, 이광수의 중학유학은 근대일본이 구축한 ‘문명’의 충격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충격도 잠시, 이해 11월 대한제국은 제2차 한일협약과 더불어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1907년에는 고종의 양위에 잇달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이에 맞선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국에서 조국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던 이광수는 소년회를 조직하고 등사판 회람잡지 《신한자유종》을 간행하여 애국심을 북돋는 비분강개한 문장을 동료들과 공유한다. 하지만 이는 곧 관헌의 눈에 띄어 압수, 극비문서 속에 잠들어 있다가 2012년에야 발견되었다.

    이광수가 오산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던 1910년 8월 29일에는 한일병합 조약이 공포되고 한국은 정식으로 일본에 병합된다.

    나는 여행을 중지하고 정거장에서 나와서 학교로 향하였다. ‘인제는 망국민이다’ 하는 생각을, 한참 길을 걸은 뒤에야 할 수가 있었다.

    나는 중도에 앉아서 얼마 동안인지 모르게 혼자 울었다. 나라가 망한다 망한다 하면서도 설마설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대황제가 이 나라의 주인이냐? 그가 무엇이길래 이 나라와 이 백성을 남의 나라에 줄 권리가 있느냐?’

    이런 생각도 났으나 그것은 ‘힘’이 있고야 할 말이다. 힘! 그렇다 힘이다! 일본은 힘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았다.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는 것도 ‘힘’이다! 대한 나라를 내려누르는 일본 나라의 힘은 오직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야 밀어낼 수가 있다(《나의 고백》, 1948).

    여행을 위해 역으로 나갔다가 대합실 벽에 붙은, ‘대한제국의 황제는 신민臣民과 통치권을 대일본제국의 천황에게 양도한다’는 조서詔書를 본 이광수는 일본과 ‘힘’을 등치시킨다. 나아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고, 자신의 장래가 이 ‘힘’을 찾는 데 바쳐질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노예가 노예의 주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다

    에도江戶시대 말기 서양에 의해 개항을 강요받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함으로써 민족 분열과 독립의 위기에서 벗어난 일본은 제국주의시대에 살아남는 길은 스스로 제국주의자가 되는 것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잇달아 승리하며 마침내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선다.

    이 무렵 일본에서 중학시절을 보낸 이광수는 일본이 조국의 국권을 조금씩 강탈하는 모습을 이를 갈며 지켜본다. 그리고 마침내 조국이 일본에 병합되었을 때, 그는 힘의 논리(제국주의의 논리)가 진리임을 통감하고 조선 민족에게 남은 길은 힘을 기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살아라.’ 삶이 동물의 유일한 목적이니 차此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는 도덕도 무無하고 시비是非도 무無하니라. 기아飢餓하여 사死에 빈瀕하거든 타인의 것을 약탈함이 어찌 악이리오. 자기가 사死함으로는 녕寧히 타인이 사死함이 정당하니라.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이광수의 외침은 타민족의 도태 정당화로까지 이어진다. 1917년 1월 《학지광》에 발표한 〈위선 수獸가 되고 연후然後에 인人이 되라〉은 이러한 이광수의 사고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글이다. 일본이 앞서 간 길을 좇는 그 길은 ‘노예가 노예의 주인이 되는’ 악순환의 길이었다.

    ‘이마를 바늘로 찌르면 일본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이 되라

    1944년 11월 이광수는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그와 동행했던 평론가 김기진金基鎭은 197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회상기 〈편편야화片片夜話〉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숙소에서 이광수와 한 방에 들었던 김기진은 이광수에게, 일전에 춘원 당신이 《경성일보》에 조선 사람의 이마를 바늘로 찌르거든 일본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정신을 몸속에 넣어야 한다는 글을 썼고, 이를 읽고 분개한 현상윤이 여러 사람이 있는 좌석에서 이를 비난하자 아무런 대답도 못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광수가 사실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우수한 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인이 선거권을 가지고 국정國政에 참여한다면 조만간 문부대신文部大臣도 나오고 재무대신財務大臣도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일본인은 이러다 조선인이 일본을 장악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합방’한 것을 취소하자고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못 이기는 체하고 조선반도를 일본에서 되찾아 독립한다, “나는 앞일을 이렇게 내다보기 때문에 지금 일본인이 조선인을 믿도록 보이기 위해 그런 글을 썼던 거라오”라고…….

    김기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삼척동자도 곧이듣지 않을 소리”라고 말하곤 전등을 꺼버렸다고 한다. 그는 이 일화에 ‘춘원의 망상妄想’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일화에 대해 저자는 이 무렵 이광수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마를 바늘로 찌르면 일본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이 되라’는 말의 출처는 《매일신보》의 〈황민화皇民化와 조선문학〉(1940. 7. 6)이었다.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끌려가는 일본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내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 끝으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관점에 따라선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구실 삼아 조선인 독자에게 적극성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다고도 읽힐 수 있는 문장이다.

    문학과 정치,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을 넘어서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눈은 어느 곳을 향하고 있을까. 여전히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대 ‘친일파=반민족주의자’의 해묵은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문학은 정치의 논리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학 옹호론과 대일협력자의 문학은 문학으로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정치주의는 일견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학과 정치,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에 갇혀 정작 이광수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 소홀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이광수를 평가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광수가 ‘친일 인사인가 탁월한 문학가인가’라는 역사적 평가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다. 그저 그의 문학을, 그의 삶을 펼쳐 보이면서 이광수를 있는 그대로 되살린다. 이광수는 ‘힘’에 매몰되어 있었다. ‘일본’은 그러한 ‘힘’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 현실태였다. 이광수에 대한 이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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