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수당은 연애수당
    [기고] 여성혐오와 계급적 분노
        2016년 09월 06일 02: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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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한 이성애자 남성 친구가 내게 자신의 처지를 토로했다. 그 친구는 여자 손조차 못 잡아보고 군대로 끌려갔고, ‘개돼지’처럼 군 생활을 견뎌낸 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도 대학 시절엔 이루고픈 꿈이 있었고 가슴 떨리던 ‘썸녀’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처지에 언감생심이라며 그 모든 꿈을 포기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계속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인턴 시절 자기 옆자리에 있던 여직원이 컴퓨터로 인터넷쇼핑을 하는 걸 보고 화가 났단다. 경력과 경험을 쌓기 위해 자신은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하는데, 저 여자는 저렇게 날로 먹고 있구나. 아마 여자라는 이유로 실적이 모자라도 넘어가겠지. 결국엔 회사 돈을 축내다가 ‘취집’하면 평생 저런 식으로 편하게 살겠구나. 제아무리 착하고 성실해도 취업조차 못한 자신에게 어떤 여자가 눈길을 주겠는가. 그것도 남자의 경제적 지위를 제1의 기준으로 보는, 정작 그 남자들만큼 고생하려곤 하지 않는 이기적인 한국 여자들인데….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고딩 시절 배웠던 시가 언뜻 떠올랐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다. 아직 우리 세대가 태어지도 않았던 시절의 서글픈 한 청년에 대한 얘기다. 교과서와 문제집들에서 봤던 그 시가 다시 되살아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요즘 청년세대를 두고 ‘N포세대’라 한다. 원래는 ‘3포’였다가 ‘7포’까지 늘어나더니 이젠 ‘N포’로 무한대에 이른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미래가 없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N개의 가능성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 포기를 강제하는 자신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 많은 청년 남성들은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불타는 사랑에 빠져야 할 시기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니다. 알바하고 학원 다니고 경력 쌓으며 어떻게든 아등바등하는 동안 누군가와의 ‘썸’은 내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열정은 계급을 뛰어넘기도 한다지만, 오늘날 남성 청년들은 사랑하기 위한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없다. 그렇다고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근래 몇 개월 간 온라인 상을 달구고 있는 메갈리아 논쟁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읽힌다. 현재 많은 청년 남성들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두고 비난을 가하고 있다. 그들의 표현 속에서 앞의 한 친구와 동일한 분노가 느껴진다. 여성혐오가 ‘남성적이지 않은 것’을 여성에게 투사하여 혐오로서 발현되는 것이라면, 지금 폭발하는 감정들을 ‘여성혐오’로 담아내기엔 너무나 강렬하다. 차라리 ‘원한’이라 칭하는 것이 더 가까울 듯싶다. 그 원한의 방향은 여성을 향하지만, 원한의 근저에선 사랑도 청춘도 누리지 못한 채 미래마저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계급적 분노가 읽힌다.

    대중적으로 표현되는 언어 이면에 깔린 맥락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다듬어내는 것이 정치와 운동의 역할일 것이다. 대중적 언어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포착하여 제도적 지원을 제안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이슈가 된 서울시 청년수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장기화된 구직 기간 중 사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만 19~29세 청년 중 중위소득 60% 이하 미취업 청년 3000명을 우선 대상으로 선정하여, 최대 6개월간 50만원씩 청년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러나 현재 논란이 된 것처럼 정책협의 대상인 보건복지부가 지속적으로 반대 의사 표명해왔으며, 지난 8월 직권취소 처분을 내린 바 있다. 서울시는 이에 대해 반발하면서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청년수당과 관련되어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지적된다. 50만원 중에서 ‘술값’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다. 그러나 50만원 중 일부가 ‘썸’ 타는 커플에게 저녁 데이트 비용으로, 연애 중인 커플에게 모텔 비용으로 쓰이면 또 어떠한가. 가뜩이나 취업도 힘든 마당에 사랑할 기회조차 없는 건 너무 비참한 일 아닌가. 저출산 시대라고 해도, 과연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구직활동에만 매달린 채 자신의 일상을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인간을 기계로 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청년들에겐 취업만큼이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

    지금 온라인 상에서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청년 남성들에게, 만약 사랑할 여유가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이성애든 동성애든, 온전히 누군가를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만큼은 지갑 걱정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리 넓지 않아도 계속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보금자리가 주어졌다면 어떠했을까. 메갈리안과 ‘김치녀’들에게 그들의 계급적 원한을 투영하며 증오의 언사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현재의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가족제도와 젠더체계는 현재 큰 변동을 겪는 중이다. 이 변동에 대응해 메갈리아는 젠더체계의 의미 있는 변화를, 반 메갈리아를 외치는 이들은 전통적 가부장제의 온존(혹은 그 비슷한 것?)을 꿈꾸고 있다. 또한 구조적 변동은 동성애 가족, 반려동물, 비혼과 1인가구 증가 등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갈등과 논란이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이 변동에 대해 이젠 정치와 운동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당 사태는 그러한 역할을 방기한 것에 대한 후과다. 그 개입의 시작에 청년수당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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