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종속된 스포츠
[왼쪽에서 본 F1] '사람이 먼저'
    2016년 09월 05일 10:26 오전

Print Friendly

2016 F1 시즌이 긴 여름 휴가를 마치고 후반기 레이스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뉴스에 귀 기울이지 않던 팬이라면, 중계 화면에서 새로운 얼굴을 하나 발견하고 조금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여름 휴가 전까지 매노어 레이싱 팀 소속으로 F1에 참가하던 인도네시아 출신의 리오 하리안토가 사라진 자리에, 프랑스 출신 열아홉 살의 신예 에스테반 오콘이 대신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가장 너그럽게 사건을 이해해준다면, 전반기 열두 차례 F1 그랑프리를 치르면서 하리안토의 성적이 좋지 않았고, 몇 차례 연습 주행에 나섰던 오콘이 기대 이상의 기량을 보여줬기 때문에 교체가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프로스포츠의 특성상,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를 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변명일 뿐이란 사실을 모르는 F1 전문가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뉴스를 열심히 찾아보는 팬들만 해도 어떤 배경이 드라이버 교체를 만들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로 돈이었습니다.

리오 하리안토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후원을 받는 ‘페이 드라이버’, 즉 F1 그랑프리에 참가하기 위해 팀에 돈을 지급하고 시트를 산 드라이버였습니다. 그런데 F1 드라이버 시트를 사는 돈은 그렇게 만만한 규모가 아닙니다. 한 시즌 동안 드라이버 한 명의 시트를 차지하는 데 필요한 돈은 팀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돈으로 수백 억에 이르기 때문에, 10억 원이 넘는 돈을 쓰고 단 한 차례 레이스에 참가해보는 드라이버가 나오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리안토에 대한 후원이 생각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소속 팀 매노어는 하리안토가 지급하기로 한 금액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기한을 연기해주다가 여름휴가 기간에 결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21개의 레이스 중 12개 대회를 소화했으니, 절반의 금액만 송금한 하리안토로서는 ‘산술적으로’ 손해 본 것은 없는 셈입니다.

1

2016 벨기에 그랑프리를 통해 F1에 데뷔한 에스테반 오콘

계약의 내용을 존중해야 하지만, 하리안토가 시트를 잃게 된 것은 여러모로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돈 문제가 아니라 ‘성과를 판단한 교체’가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다른 면에서 문제가 있겠지만, 사실상 돈 문제가 시트의 주인공을 결정하고 시즌 중 드라이버 교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결코 맘 편히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과거 여러 차례 얘기했던 대로 F1은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입니다. 다른 프로 스포츠들이 돈에 종속돼 있다고 하지만, 모터스포츠만큼 뿌리 깊게, 폭넓게 돈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포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터스포츠의 첨병이랄 수 있는 F1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원래 자본주의적 성격이다’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돈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페이 드라이버가 돈을 제때 보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시트를 잃지 않은 예가 많이 존재합니다. 완전히 별개의 경우랄 수 있지만, 2012년과 2013년, 당시 로터스 F1 팀으로부터 수당을 제때 받지 못했던 키미 라이코넨이 바로 팀을 떠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계속 노력했던 것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돈과 계약 관계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매노어의 내부 사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딱히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소형 팀을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페이 드라이버를 냉정하게 내칠 수 있는 모습이 ‘그래도 돈보다 사람’을 생각하는 많은 팬에게 어떻게 비칠지, 경제적 어려움이 큰 다른 팀들에게 어떤 선례를 만들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미지만큼은 사람이 즐거워야 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에서 돈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한대서야 좋게 바라볼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2

팀 매각을 통해 목숨을 부지한 자우버 F1 팀

최근 F1을 둘러싼 돈의 영향력이 더 강화된 예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5년 전통의 자우버 F1 팀이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위스의 투자자에게 매각된 것이 그런 예입니다. 설립자이자 오너였던 피터 자우버가 완전히 팀을 떠났고, ‘투자 회사의 방침’에 따라 팀이 움직이게 됐습니다. F1에서 순수한 독립 팀으로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버텨오던 팀이 결국 돈 앞에 무릎을 꿇은 셈입니다.

팀을 운영하는데 많은 돈이 소모되는 F1의 특성상 경영난에 빠져 팀이 문을 닫는 일이 흔한 것도 사실이지만, 전통의 F1 독립 팀이 하나 매각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독립 팀들이 비슷한 경제 위기에 빠져서 역시 투자자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F1 팀인 상황에서 바람직한 투자자를 선별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F1 전체를 보더라도, 다국적 자본으로 모터스포츠 자체에 전문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CVC가 F1을 매입한 이후 ‘돈 문제에만 집중하는’ 운영이 늘 비난의 대상이 됐습니다. 돈을 우선시하고 사람과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뒤로 하다 보니, F1에 ‘성과 지상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단순히 인간미가 사라지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시청률, 매출과 연관되는 단순한 논리로 판단되면서, 스포츠 본연의 색깔이 희미해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어쩔 수 없이 작은 독립 팀을 지키기 위한 비용 절감 노력이 이뤄지고는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돈이, 자본이 스포츠를 쥐고 흔드는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이상, 성과 지상주의와 냉정한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요원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테반 오콘이라는 장래가 촉망받는 유망주가 F1에 데뷔했다는 소식이나, 자우버 F1 팀이 투자자를 찾아 팀의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급여를 지급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마냥 기분 좋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돈의 논리로 내린 결정과 돈의 논리에 따라 회사를 인수한 투자자가 어떻게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 주변에서 이미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색깔과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무시하고, 돈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기본을 잊고, 당장의 자본의 논리에 백기 투항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F1의 성공을 보장한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삐뚤어진 이미지는 스포츠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것이고, 오랜 고정 팬들을 떠나보낸 자리엔 아무 애정 없는 무표정한 사람만이 남을지 모릅니다. 이런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돈의 논리가 절대적이 되고,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가 돈의 노예가 되는 것만큼은 분명히 반대하는 목소리와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