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9년 경성,
    진명여고생 전차 전복사고
    [과거와 현재] 경성전기와 구의역
        2016년 08월 22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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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4월 22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 날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개교 23주년 기념일. 기념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청량리 홍릉으로 참배를 가기 위해 전세를 낸 전차 세 대에 나누어탔다. 홍릉에는 진명여고의 설립자인 엄비(고종의 후비)의 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만의 나들이에 즐거운 학생들의 재잘거림도 잠시,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복궁 서쪽 모퉁이 서십자각 자리(1923년 철거)를 돌던 전차 한 대가 탈선하여 전복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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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복된 전차와 입원한 학생들(『매일신보』1929.4.23.

    경복궁 서편 진명여고 앞을 지나는 전차는 효자동에서 출발하여 경복궁 서쪽 모퉁이를 돌아 광화문 앞에서 현재 세종대로를 따라 종로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당시 경복궁 서쪽 길 하나 건너에 위치한 진명여고 앞은 효자동 다음 정류장이었다. 이 노선은 원래 궁궐 모퉁이를 도는 급커브로 유명했는데, 운전수가 그만 커브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바람에 전차가 탈선했던 것이다. 전차에는 약 120명 정도의 학생이 타고 있었는데, 중경상자는 거의 100명 이상이었다. 사고 직후부터 여론에서는 운전수의 부주의와 더불어 더 근본적인 회사 책임론을 제기했다.

    전차 전복 사고의 원인이 운전수에 있다고 하며 정원 이상의 승객을 태운 것은 회사로서는 큰 책임이 없다고 극구 변명하나 (중략) 회사로서는 당연히 감독을 파송하여 정원 이상의 승차를 거절하여야 하는데 회사에서는 감독을 파송치 않았으며 또한 법규상으로 보면 정원 이상의 승객을 태운 것은 운전수의 과실에 돌아가기로 되어있으나 운전수의 과실이 즉 회사의 과실로 될 수 밖에 없는데 더욱 운전수의 과실은 회사가 직접 져야 될 수 밖에 없다는 간접 원인 중에 가장 큰 자는 회사에서는 많은 이익을 얻으면서도 경비 절약에 급급하여 노련한 운전수는 약간의 퇴직금을 주어서 정리하여 보내고 급료가 저렴한 젊은 운전수만 사용하기 때문에 경험조차 부족하고 기술이 없을 뿐더러 젊은 관계로 직무에 충실치 못한 여러 가지 원인을 지으면서도 시간은 채우느라고 운전대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라더라. (『동아일보』, 1929.4.25.)

    위 기사는 사고의 일차적인 책임이 운전수의 운전 미숙에 있다고 하면서도 그 보다도 회사, 즉 경성 전차를 운영하는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책임을 논하고 있다. 이 기사가 지적한 경성전기의 책임은 첫째, 정원 이상의 승객을 태우는 것에 대한 감독 소홀, 둘째, 비용 절약을 위해 노련한 운전수를 해고하고 경험이 부족한 운전수를 고용한 것 등 두 가지이다.

    이런 가운데 시간이 흘러도 사고의 여파는 가라앉지 않았다.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학생 중에서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으로 재입원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사고 당시에는 괜찮은 듯 보였다가 한참 뒤에야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례는 사고 한, 두 달 뒤는 물론 여덟 달이나 지난 연말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회사 측의 ‘비인도적인’ 행동은 또 나타나고 있었다.

    경성전기회사에서는 무책임하고도 온당치 못한 행동을 감행하여 학교당국과 일반 부형들의 감정을 일층 상하게 한 일이 있었다는데 이제 그 내용을 듣건대 지난번 부상자 중으로 일단 완치되었다고 한 학생과 그 때 무시되었던 학생이 내상된 것이 발견되어 (중략) 정신상 일종의 불안을 느끼게 되어 마침내 재진찰을 한 결과 뜻밖에 부상한 것을 원인으로 신경병에 걸린 학생이 많아 신경병 전문인 한성병원에 입원을 시켰더니 전기회사로부터 우리는 세브란스병원과 의전병원을 지정하였은 즉 그외의 의원에 입원한 사람은 절대로 치료비를 물 수가 없다고 하므로 학교측에서는 그 부득이한 것을 말한 즉 그러면 다른 병원에 입원하더라도 반드시 우리가 지정한 병원을 경유해 가라고 명령 같이 말을 하였다 하여 학부형측에서는 더욱 흥분이 되어 전기회사의 성의를 의심하는 동시에 불만이 많다더라. (중략) 이 한편으로 전기회사에서는 서계원 등을 파견하여 한성병원에 와서 우리는 병자를 위문하러 왔다고 말한 후 병원의 허가도 없이 입원실로 뛰어들어가 마치 형사가 심문하는 모양으로 입원한 학생들의 성명을 물어 수첩에 적는 동시에 (중략) 때마침 동무들이 와서 이야기하며 놀던 중인데 그들은 너희들은 무엇하러 왔느냐 또는 앓는 사람이 어찌 머리를 빗고 있느냐 또는 아프다는 사람이 어찌 그와 같이 이야기하며 놀고 있느냐고 힐난함으로 학생들은 어찌 할줄을 몰라 그만 울기를 시작하여 한참 동안이나 겁나는 울음을 운 일까지 있어 학교와 일반 부형들은 크게 분개를 하는 중이라더라. (『동아일보』, 1929.6.24.)

    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난 학생들이 뒤늦게 정신과 전문 병원에 입원하자 경성전기 측에서 회사가 지정한 병원에 입원하라고 간섭을 하고, 또 입원한 학생들을 찾아가 여러 모로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경성전기가 굳이 나서서 이렇게 비인도적인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고 직후부터 지루하게 이어진 학부형회와 회사 사이의 ‘위자료 협상’ 때문이었다. 이 사고의 경우 피해자가 상당한 집안의 자제인 여고보생이었으므로 민사상 위자료 청구를 위한 활동도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례로 피해자측의 법률 대리인은 저명한 조선인 변호사 김병로(신간회 회장, 8.15 이후 초대 대법원장 역임)였다. 이렇게 피해자 측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음에 따라 회사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경성전기 측의 대응도 ‘무리수’에 가까울 만큼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론의 회사 책임론, 피해자 측의 위자료 청구 등과는 별개로 이 사고의 형사적 책임은 처음부터 오로지 운전수의 “운전 기술의 졸렬함”에만 지워졌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 운전수 석갑동에게 금고 6개월이 최종 선고됨에 따라 사고의 형사적 조치는 종결되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대형 교통사고인 이 사고의 처리는 실질적으로 경성전기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귀결되었던 셈이다. 위자료 문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고의 책임 추궁은 오롯이 운전수 석갑동 한 사람의 처벌로 끝났다. 운전수를 제외한 회사 측의 어느 누구도 사고 책임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고 직후 언론이 제기한 여러 문제들(승차 정원 위반, 미숙련 운전수 고용 등)도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진명여고생 전차 전복 사고와 같은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한 구조적인 원인은 경성 전차의 운영 과정의 문제점을 전반을 이해해야 비로소 납득할 수 있다. 식민지시기 전 기간에 걸쳐 경성 전차에 대한 주민의 이미지는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차의 수는 늘 부족한 데다가 잦은 고장과 정전으로 배차 간격은 항상 예정보다 늘어졌고, 그만큼 많은 승객이 한꺼번에 몰려 전차는 늘 만원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들어 급속한 도시화와 공업화에 의해 경성의 생활 공간이 확장되고, 주민의 이동 거리가 늘어나면서 승객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경성의 교통난을 가리켜 “사바세계의 아수라”니 “교통지옥”이니 하는 등으로 표현하는 기사가 연일 등장할 정도였다. 8.15 전후 경성의 1일 전차 이용객 평균은 약 50만명이었으며 경성전기의 전차 보유 대수는 250대 정도였다. 정원 100명이 채 안 되는 전차 한 대가 하루 평균 2천명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얼마만큼 ‘만원 전차’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교통난은 교통사고의 빈발로 연결되었다.

    경성 전차는 식민지 시기 전 기간에 걸쳐 경성전기의 독점 운영이었다. 그리고 전차가 대중교통의 거의 전부였으므로 결국 식민지시기 내내 경성의 대중교통은 경성전기의 독점 운영이었던 셈이다. 즉 하나의 사기업의 손에 의해 경성의 대중교통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경성전기의 운영 방침은 철저하게 ‘이윤 우선주의’, ‘주주 우선주의’였다. 심지어 다른 회사가 무배당․결손 운영을 하는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기에도 경성전기는 10% 내외의 고배당을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사업 독점으로 일정한 수익이 항상 보장되어 있었던 점이었으며, 다음으로 ‘비용 절감’, ‘인색한 투자’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비싼 요금, 노후 차량 미교체, 점검 부실, 신규 차량 미도입, 과다 인원 승차, 저임금․미숙련 운전수 고용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위자료를 줄이기 위한 피해자 측에 대한 압박이나 실랑이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성전기도 언제까지나 현상 유지적인 전차 운영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1930년대 후반 경성의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교통난도 이전에 비해 질적으로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경성전기는 교통난에 대한 대책으로 러쉬 아워에는 전차 정류장을 119개에서 76개로 줄인 ‘급행 전차’를 운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942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29개 정류장에만 서는 ‘급급행 전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좌석을 뜯어내어 승차 정원을 늘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조치들은 역설적으로 경성전기가 끝끝내 교통 환경의 근본적 개선에 미온적이었음을 보여준다. 8.15 때까지도 차량 증차 등 고정 비용 투자가 필요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으며, 모든 조치는 비용이 필요 없는 조삼모사식에 불과했다. 이윤을 최우선하는 경성전기의 전차 운영은 최악의 교통난과 교통사고의 위험을 유산으로 남겼다.

    오늘날 수많은 도시 생활자들은 늘 ‘도시의 재해’의 위험성을 안고 살아간다. ‘도시의 재해’는 자본의 이익과 결부된 부실 측면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대의 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개 사고의 책임은 직접 연루되어 있는 몇 사람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다. 비근한 예로 최근 일어난 불행한 사고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도 초기에 사고 책임을 용역업체 직원인 김 군의 과실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있지 않았던가? 마치 1929년 전차 전복 사고의 모든 책임이 운전수 석갑동의 과실로 돌려졌던 것처럼.

    그러나 김 군이 만일 작업 규정을 위반했다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김군이 규정을 지킬 수 없었던 ‘구조’, 즉 열악한 작업 환경과 비용 절감을 위한 고장 수리 업무의 외주화, 저임금 비정규직의 고용, 관리 소홀 등에 돌려져야 할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모든 시민이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 글은 곧 발표될 필자의 글(교통사고 근대의 재해, 도시의 재해」『문화과학2016 가을호)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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