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아가씨'의 불편함
    같은 방 두 명의 자위 그리고 하나
        2016년 08월 19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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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격월간 예술잡지 <B-Art> 43호(2016. 7)에 실린 글입니다. 저자의 허락을 받아 약간의 수정을 거처 수록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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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가씨의 미장센은 실로 수려했다. 미장센을 뽑아내는 그의 솜씨도 능수능란했다. 다른 평론가들이 박찬욱의 이미지에 우아하다는 ‘수사’를 붙이는 이유일 게다. 전작 <박쥐>의 고전적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서양과 일본이 기계적으로 접합된 건물에 식민조선의 삶이 기생하고 있다.

    서사구조는 마치 헤겔 변증법을 기계화시킨 정•반•합의 구도를 그대로 사용한다. 최종 합(合)에 이르러 퀴어의 해방을 선언하며 영화는 마무리 된다. 참 우아하고 멋진 마무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나의 불편함과 끝내 화해하지는 못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보다. 몇몇 평론가들도 그의 영화에 ‘퀴어+포르노’라는 상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박찬욱은 관절 페티시가 있다. <올드 보이>에서 보였던 무릎 페티시가 <아가씨>에서는 팔꿈치로 변형되어 있을 뿐 여전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페티시가 아니다. 마초 에로티즘의 전면화가 문제다. 전면화된 마초 에로스가 폭력과 결부된 것도 여전하다. 폭력과 섹스가 만나면 쾌락은 치명성을 장착한다.

    에로스의 본질이 금기를 넘어서려는 것이라는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박찬욱의 에로스는 시종 금기를 돌파하는 폭력을 전시한다. 그의 영화 전체에 이런 에로스적 폭력은 철철 넘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좋은 폭력(납치)과 나쁜 폭력(납치)으로 납치라는 절대적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에로스적 요소가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지만, <올드 보이>에서는 감금의 폭력과 결부된 에로스(소문과 감옥의 폐쇄적 폭력과 결부된 근친상간이라는 에로스)가 폭발적 힘을 발휘한다. <아가씨> 역시 다르지 않다.

    폭발하는 에로스의 힘에 마초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사실, 그의 이전 영화에서 등장하던 에로티즘의 코드는 모두 마초의 것이었다. 복수의 논리로 점철된 폭력은 전통적으로 마초 남성의 것이다. 단절된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 자기만의 에로스에 탐닉하던 사람들이 복수의 폭력을 작동시킨다. 그런 점에서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는 마초 에로티즘의 교과서다. 이렇게 판정하는 근거는 마초 에로티즘의 고전적 참고서를 하나 추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싶다. 성서다.

    예컨대 성서의 신은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는 일(르우벤의 사건이나 아도니야의 사건)은 강력히 처벌해도, 아버지와 딸의 섹스는 처벌하지 않는다.(롯과 두 딸의 섹스) 게이 섹스(소돔과 고모라)는 처벌해도, 시아버지(유다)와 며느리(다말)의 섹스는 처벌하지 않는다. 신은 아비의 섹스를 도무지 처벌할 생각이 없다. 반면 오난(자위를 의미하는 오나니의 어원이 된 인물)의 자위는 죽음으로 처벌되는데, 이 역시 마초이즘의 연장이다. 왜냐하면 자위는 아비의 ‘번식’을 방해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에로티즘이 지금의 상식과 반함에도 허용될 때는, 모두 아버지(아저씨)의 에로티즘을 강화하거나 정당화 할 때이다. 성서의 아비는 폭력과 섹스에 제한이 없다. 캘파나 세샤드리-크룩스의 「인간됨: 수간, 식인, 그리고 법」에 따르면, 이 제한 없는 아비의 폭력과 섹스를 금지시킴으로써 법이 비로소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그 법의 원시적 형태가 바로 식인과 수간의 금지였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과 섹스하지 않으며, 우리와 섹스하는 것을 먹지 않는다.”라는 최초의 원칙이 법의 근원적 기억이다. 그러니 성서든 법이든 그 근본적인 내용 속에 아버지의 제한 없는 번식과 폭력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법이고 신성이다. 어차피 하나님도 ‘아버지’ 아닌가. 아버지(아브라함)의 생육과 번식은 초법적 신성의 영역이다. 이것이 성서적 마초 에로스의 치명성이다.

    아가씨0

    이 아버지 에로스의 규칙이 박찬욱의 영화에 그대로 등장한다. 그가 만든 복수 3부작만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실로 아버지(아저씨) 에로스의 총체다. 예컨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아픈 누나의 신음을 교성으로 착각하고 벽 너머에서 수음하던 남성들, 그리고 납치와 섹스를 교차시키면서 방해받은 아버지의 치명적 복수라는 감옥을 작동시킨다.

    그러고 보니 성서에서 등장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간교한 복수 역시 납치강간과 연결되어 있다.(여동생을 범한 히위족속을 멸족시켰던 복수의 화신 야곱의 아들들(야곱의 딸 디나의 강간 사건) 이야기를 참고하라) 이것이 <올드보이>에서는 근친상간하는 아버지(아저씨)로 전치되면서 이제 치명적 폭력은 에로스와 ‘노골적으로’ 사귀기 시작한다. 이 역시 성서에서 인정되는 부녀 간,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 섹스를 반영하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롤리타 컴플렉스에 더하여, 식사 하다가 아내를 동물 대하듯 강간하는 섹스를 선보이며 마초 페티시가 전시된다. 그나마 <금자씨>의 경우 마초의 거세와 피해자 공동체 형성으로 영화가 마무리되기는 한다. 그 분위기가 <박쥐>로 연장되는 듯하지만 정작 그렇지 않다. ‘성경’의 아버지(아저씨) 마초이즘은 <박쥐>에서 신부(아버지 father)로 수렴되지만, 만족을 모르는 결핍 투성이인 여성, 그러니까 욕망하는 결핍인 김옥빈을 아버지 구원자의 순교를 통해 다시 아버지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신성을 위반하며 죽음까지 파고들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던 에로스는 아버지의 참회와 순교를 통해 다시 아버지의 질서로 투항한다.

    어쩌면 여기서 영화 <엑소시스트>를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성의 결핍 또는 결핍으로서의 여성은 결코 아비 없이 치유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두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공모하고 있다. 아비 없이(결핍) 사는 모녀의 집에 귀신이 파고든다. 귀신(남성들의 거세 공포)을 제거하는 것은 아버지, 즉 신부(father)의 순교였다. 아버지가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메시지를 뒤에 숨겨두었던 <엑소시스트>의 신화가 <박쥐>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기껏 어긋 냈던 소수자들이 다시 성스러운 아버지에게 납치됐다. 80년대 보수적 문법이 복고된다. 뭔가 불길하다.

    <박쥐>의 불길함이 <아가씨>에서는 노골적으로 전면화된다. <아가씨>는 ‘사드’를 통해 ‘퀴어’를 전유함으로써, 아버지 에로스를 전면에 드러낸다. 영화는 사드의 규방철학의 형식을 인용하여 섹스를 낭독하고 섹스를 말한다.

    그런데 정작 사드의 책에서는 에로스를 조율하던 사람은 여성이었다.(규방철학 53쪽 참고.) 섹스를 말하고, 가르치는 중 사정을 통해 에로스를 ‘해소’하려는 남성의 행위를 중단시켜 에로스를 ‘연장’시킴으로써 남성 에로스에 대한 결정권(주권)을 갖는 사람이 바로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말을 시키고, 관능을 연출시키는 감독역을 맡음으로써 에로스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주권)을 최종적으로 뺏는다. 이미 시대상이 여성의 근본적인 패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위에 여성의 1패를 더 한 셈이다. 이미 여기서 <아가씨>는 이전 영화에서 등장했던 마초적 에로티즘의 연장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가씨2

    예상된 여성의 패배가 연장되는 가운데 아가씨가 숙희(김태리)를 만나더니, 이제 이들은 말이 아니라 프레임에 갇혀 영상으로 관객에게 자기들의 관능을 전시하기 시작한다. 마치 영화는 책의 시대에서 영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혼자 보는 책과 달리, 영화는 사람들과 같이 보게 되어 있다. 이제 말하던 한 사람은 보여주는 두 사람으로 바뀐다.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부정합, 소설과 영화의 부정합, 선형적 서사와 몽타주의 부정합이 영화에 나오는 일식 건물과 서양식 건물의 부정합과 묘하게 연결된다. 부정합된 건물에 간간이 벌어지는 (정전)사건 혹은 사고가 이미 하녀와 아가씨의 부정합이 모종의 사고를 내고 말 것임을 이상하리만큼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한다.

    하녀와 아가씨의 ‘부정합적’ 퀴어, 즉 ‘무리한’ 레즈비언 섹스가 정확히 프레임 안에 전시되는 순간, 관객은 두 여성의 섹스를 관람하는 관객, 즉 조진웅(박찬욱)에 의해 섹스 낭독(관람)회에 초대된 관객으로 강제된다. 이렇게 포르노 소설을 포르노 영화로 강제 부정합시키는 순간 불편(사고)은 시작된다. 동시에 이 영화가 퀴어의 해방이 아니라, 퀴어 해방이라는 가면을 쓴 위장된 마초이즘으로 끝날 가능성도 예고한다.

    앞서 언급하지 않은 아버지(아저씨) 에로티즘이 하나 더 있다. 아버지(아저씨) 에로티즘은 게이 섹스를 혐오하지만, 레즈비언 섹스에는 관대하거나 오히려 쾌락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아저씨는 여자들의 섹스를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간혹 두 여성 사이에 자신을 섞어 넣는 환상(쓰리썸)을 작동시킨다. 관음과 혼음의 상상으로 만족에 이르는 게 레즈비언 섹스를 즐기는 아저씨 에로티즘의 또 다른 코드이다. <아가씨>에서 박찬욱의 아버지(아저씨) 에로티즘은 또 하나의 전리품을 획득한다. 하지만 어떤 관객은 프레임에 갇힌 두 여성의 섹스를 지켜보게 만든 감독의 강제된 관음성 때문에 불편하다.

    영화의 교묘함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여성의 에로티즘이 퀴어의 해방선언과 ‘형식적으로’ 접속하기 때문이다. 아가씨가 책방에서 어떤 책을 읽고 낭독했는지를 하녀가 보고 분노하고 책을 찢는 도덕적 반응 또는 연대적 동정을 일부러 보여주면서 ‘위장된’ 해방의 미장센을 펼치긴 하지만, 정작 이들의 사랑과 연대를 언급하기엔 그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고 감정선은 단순하다. 제한을 모르던 두 아버지의 에로스가 끝내 거세되지만, 이는 퀴어 해방이라는 포장지로 아버지 에로티즘을 은폐해보겠다는 박찬욱 특유의 음흉함에 불과하다. 다양한 부정교합 덕에 영화 이미지는 마치 해석의 다양성을 내포한 것처럼 비친다. 심지어 칸의 아우라에 포획된 관객은 깐느 박의 이미지를 해방의 이미지로 오해하고 싶을 것이다.

    감독은 이제 슬 악랄해진다. 영화는 마초 남성을 만족시키는 퀴어 에로티즘을 질펀하게 보여 준 후, 마초들을 최종적으로 거세할 수 있는 퀴어를 소재로 퀴어 도덕의 승리를 ‘성급하게’ 선언한다. 그것도 80년대 B급 영화의 대표적 공식을 퀴어라는 장식을 달아 다시 보여줄 뿐이다. <엑소시스트>와 <박쥐>의 공모 관계 역시 <아가씨>에서 80년대 헐리우드 공포영화의 공식으로 재확인된다. 위반으로서의 섹스와 섹스를 처벌하는 폭력 그리고 도덕의 최종승리라는 보수적 공식 말이다. 실제로 박찬욱은 감독은 데뷔 이전 B급 영화 평론으로 정평이 나 있던 사람 아니던가.

    물론 감독이 질펀한 마초적 쾌락을 거세한 후, 회복시킨 도덕은 이전의 아버지(아저씨) 도덕이 아니라 퀴어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도덕이기는 하다. 제한을 모르던 기존의 아저씨 에로티즘이 거세된 후, 박찬욱은 곧장 아가씨! 도덕으로 내달린다. 그것도 앞서 언급했듯이 레즈비언 섹스를 즐기는 아저씨의 관음적 에로티즘과 아가씨의 퀴어적 에로티즘 사이에 교묘히 다리를 놓아, 영화적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두 여성간의 연대와 동정을 매개로 아가씨 도덕의 승리로 비약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주는 아가씨의 도덕이라는 것이 이미 새롭다고 오래 전에 선언된 것을 어설프게 되풀이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가씨>가 선언하는 해방은 늘 신상이라고 광고하는 클리셰한 상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아가씨>는 이미 선언된 해방(물론 성취되지는 않았지만)을 해방의 선언으로 퇴행시켜 새로움으로 가장한 옛 도덕으로 회귀하였다. 덕분에 영화는 (새로운?) 도덕도 보호하고 자본의 이득도 누리는 안전하고 보수적 80년대 공포영화의 퀴어적 답습에 그친다. 이쯤 되면 정작 퀴어의 해방을 선언한 것은 정작 아가씨가 아닌 아저씨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자신의 관음을 위해 특별히 허용한 ‘예외적 에로스’말이다. 제한을 모르던 아저씨 에로티즘은 영화적 환영으로 거세 효과만을 냈을 뿐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거세는 일어나지 않았고, 해방도 선언되지 않았다.

    낭독의 고상함에 깃든 마초적 음탕함이라는 모순, 영화 속 정•반•합(3부)의 기계적 변증법을 통해 해방으로 위장된 관음증적 시선이라는 모순, 숙희라는 여성의 시선을 오히려 남성의 관음적 시선처럼 연출하는 모순 등, 영화는 다양한 부정교합을 연출했다. 그 사이 <아가씨>의 미장센이 보여주는 탐미는 관음의 탐욕에 들러붙는다. 이 모호한 콜라주가 집의 알레고리였던 것일까. 이 기괴한 부정교합의 풍경은 마치 서양식과 일본식이 물리적으로 접착된 건물의 알레고리였던 것일까. 이러한 부정교합 덕분에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정전은 이 영화가 해방을 선언하게 될 것이라는 클리셰가 된다.

    이 부정교합들의 난장 덕에 영화는 레즈비언 섹스를 향한 관객의 관음적 시선도 만족시키고 두 남성의 파멸과 두 여성의 해방을 보려는 관객의 퀴어적 시선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퀴어에게 해방을 선언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 <아가씨>의 몇 장면은 정작 마초들이 웹에서 짤방 사진으로 활용되는 중이다. 퀴어의 가면을 쓴 80년대의 보수적 마초 코드는 퀴어를 순진하게 만들고, 마초를 음흉하게 만든다.

    영화의 악랄함은 한층 더해진다. 같은 방에 감금된 관객들은 이제 각자 자기의 관점으로 영화를 향한 만족을 쏟아 낸다. 이미 절대 만날 수 없는 마초 vs 퀴어의 혈투 또는 다수성 vs 소수성의 혈투가 극장 밖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극장이든 그 어떤 장소이든) 마치 같은 감방에서 앞에 놓인 거울(영화)로 자기를 보면서 자위하다가 옆 상대의 자위를 발견하고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상황이 이어서 연출된다. 이 대결은 결코 종료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복수의 폭력으로 점화될 수도 있겠지만, 감독은 관심 없다. 이러한 혈투가 그에게 주는 건 청불영화 역대 흥행기록 갱신이라는 새로운 페니스의 발기다. 그는 자신의 페니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쓰다듬으면 될 뿐이다. (영화 비평을 통해 이 모든 상황을 모두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비극이다.)

    퀴어의 우토포스(Utopos: utopia의 어원)를 찾아 떠났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박찬욱의 아저씨 페티시라는 폐허의 토포스에 잘못 정박했다. 박찬욱의 <아가씨>를 ‘우아한 퀴어 포르노’(영화평론가 최광희)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가씨로 위장된 아저씨의 토포스에서 탈출하여 다른 곳으로 가길 권한다. 탈출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아니면 자위를 중단하고, 그 장소를 퀴어의 토포스로 바꾸는 건 어떨까? 이를 테면 <아가씨>를 다르게 상상하는 거다. 예컨대 김민희의 분열이 더 악랄하게 진행되었다거나, 김민희나 김태리가 양성애자나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조진웅과 하정우가 게이였다면 등.

    하지만 이것도 싫다면, 마지막으로 탈출을 위해 한 마디만 더 하자. “<아가씨> 따위가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그렇다면 <아가씨>를 이쯤에서 그만 잊어버리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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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예술잡지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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