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곤 쉴레'
    그리고 '사운드 오브 뮤직'
    [유럽통신④] 오스트리아와 한국
        2016년 08월 18일 03: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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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쉴레와 구스타프 클림트. 빈을 대표하는 두 화가를 만나러 레오폴드 미술관에 왔습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적군요(벨베드레 궁에 더 많음). 그 대신 쉴레의 작품은 이 미술관이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28살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한 천재 에곤 쉴레. 일단 편집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밤 기차로 베니스로 떠납니다. 어째 시간을 내어 빈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올려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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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브 클림트와 에곤 쉴레

    A. 천재 화가 에곤 쉴레가 빈 예술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1907년. 17살의 쉴레는 당시 46살로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던 클린트를 처음 만나서 자기 드로잉 몇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저한테 재능이 있는가요?”

    평생 쉴레의 후원자가 되었던 예술 칼럼니스트 “아서 로에슬러(Arther Roesller)의 목격담에 따르면 클림트는 이렇게 열광적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미술관에서 읽은 이야기임). “재능이 있냐고? 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그리고 (자신도 천재라 불렸으면서도) 쉴레의 재능이 정말 부럽기 짝이 없다 말했다는군요.

    29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지지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되었고, 특히 쉴레는 클림트를 통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유럽 인상주의, 상징주의, 유겐트스틸 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일본 판화미술의 표현기법과 구도를 흡수했습니다.

    사춘기의 쉴레는 클림트의 강력한 지지 아래 화가의 길로 나아갔고, 후일 서로 예술관이 결별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상대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답니다. 둘은 서로 그림을 자주 맞바꾸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클림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네 그림을 내 것과 바꾸려 하나. 네 그림이 훨씬 나은데 말야!”

    1918년 28살의 새파란 나이에 임신한 아내를 앞세우고 세상을 떠난 에곤 쉴레는 임종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났어. 나는 가야 해. 세계 최고의 모든 미술관에 내 작품이 걸려야만 해!”

    스스로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시대의식에 대한 자각이 어떠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B. 구스타브 클림트 팬들이 많으시지요? 오스트리아 유겐트스틸(jugenegstil, 아르누보의 독일식 표현) 양식을 대표하는 이 거장은, 과감한 색채와 상징적 표현 그리고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작품으로 전 세계적 매니아 층을 거느리고 있지요.

    특히 <키스>, <죽음과 삶>같은 작품은 그 풍부한 상징성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제가 찾은 레오폴드 미술관에는 <죽음과 삶(1911년에 처음 그려져서 1916년에 바탕 그림의 황금색을 짙은 녹색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의 얼굴을 치켜들게 다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키스는 벨베데르 궁전에 있는데, 폐관 30분전에 도착해서 20유로 입장료가 너무 아까워 안 봄^^. 클림트의 그림만 익숙할 뿐 그의 실제 얼굴은 빈에 와서 처음 봤습니다. 레오폴드 미술관 4층 전시실 입구 쪽에 클림트 사진이 여럿 있는데…. 놀랐습니다. 너무나 평범하게 생긴, 이를테면 중년 농부 아저씨의 얼굴이군요. ^^

    그의 그림이 주는 이미지는 아주 댄디(dandy)하고 샤프한데 말이지요. 둥그런 턱살에 사람좋은 표정의 구스타프 클림트. 평생 결혼도 안 하고 뜨거운 로맨스를 즐긴 플레이보이 이미지 치고는 의외였습니다. 반면에 미술관 여러 곳에 걸려있는 에곤 쉴레의 얼굴은, 익히 알려진 그의 자화상의 느낌이 고스란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그린 그의 얼굴보다 더 예민하고 날카로운 세기말적 프로필입니다.

    이 미술관에는 쉴레의 유화만 40점, 그 밖의 드로잉은 90점 이상이 전시되어있습니다. 그림이 너무 많아 슬라이드쇼로 보여드리는 게 나을 듯합니다. 중간에 몇 초 정도 이상한 장면이 나올 겁니다. 왠 젊은 아가씨가 미술관 바닥에 누워 온 몸을 비비 트는 장면.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무슨 간질 환자인 줄 알았답니다. 근데 자세히 보니 쉴레 그림 앞에서 행위예술을 펼치고 있는 거더군요. 새파란 나이에 세상 떠난 쉴레의 넋을 위로하려는 진혼의 몸짓인 걸까요.

    조금 전에 저와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올라온 아가씨였습니다. 옆머리를 펑크 스타일로 밀고 흰자위가 압도적으로 많아 눈빛이 묘한 기운으로 휘번덕이던(표현이 과해서 죄송^^) 인상이었어요. 혹시가 역시라고 범상치 않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p.s) 제 때 제 때 단상을 남기려는데 허덕허덕 돌아다니는 일정상 여의치가 않군요. 숙소에 들어오면 픽, 쓰러져 자느라. 일찌감치 쓰려던 바르셀로나 이야기는 아직 손도 못 댔습니다.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 옆에서 기울어가는 석양을 보면서 몇 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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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경과 수녀

    레오폴드 미술관에 전시된 쉴레 그림들이 하나같이 (1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충격적이지만 그 중 백미가 있더군요. 제목은 <추기경과 수녀> . 스물 두 살 되던 1912년에 발표한 그림입니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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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을 꿇고 서로를 끌어안은 남녀가(특히 추기경이)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습니다. 이미 두 사람은 이 순간 극단의 금기를 뛰어넘어 아득한 남자와 여자입니다. 검고 붉고 초록색의 배경 아래 남자는 여자의 목과 가슴을 뜨겁게 애무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화가 혹은 관람자를 향하고 있는 수녀의 눈에 서린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극도의 긴장감입니다.

    정작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이 포즈와 설정을 이미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머리에 맴돌던 이미지를 베니스에서 로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드디어 찾았습니다.

    1990년대 초반 세계 광고계를 강타했고 대중문화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쳤던 <베네통> 캠페인 중의 한 장면. 바로 검은색 복장의 신부가 눈처럼 환한 흰옷 입은 수녀와 열정적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었습니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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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논쟁적 광고를 만든 올리베로 토스카니(Olivero Toscani)는 과연 쉴레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던 걸까요? 한 발짝 더 나아가 혹시 쉴레에 대한 오마쥬를 시도한 것이었을까요? 토스카니를 만날 수도 없고, 또한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니 사실 확인은 쉽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에곤 쉴레가 급진적(radical) 표현주의 회화를 통해 시도했던 금기 파괴의 힘은 세기를 뛰어넘어 빈 한 모퉁이 미술관 벽 위에서 지금도 괴괴한 힘을 내뿜고 있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과 제도를 한껏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그 강도가 얼마나 세던지 제가 한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그림 앞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작품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난잡하다 할만한 사생활과 각종 스캔들을 일으켰던 에곤 쉴레. 그의 개인사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그의 그림은 오늘도 이렇게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세상을 두들겨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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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운드 오브 뮤직에 대한 또다른 해석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좋아하시는 분들 많지요? 수줍게 빛나는 젊은 날의 줄리 앤드류스(마리아 수녀). 부드럽고 중후한 미남스타 크리스토퍼 플러머. 그리고 엄마 잃은 일곱 남매의 천사 같은 춤과 노래(도레미 송 기억나실 겁니다^^). 노래와 사랑과 극적 스토리가 탄탄하게 결합되어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명작 영화였습니다(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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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영화는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된 후 미친 듯이 군국주의화되어 가는 조국을 고통스레 지켜보다가 끝내 가족을 이끌고 망명의 길 떠나는 한 오스트리아 남자의 스토리로도 기억됩니다. 플러머가 분한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트랍이 바로 그 사람(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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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이 퇴역 해군 대령은 아이들을 위해 매혹적 바리톤으로 <에델바이스>를 불러주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애국자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조국이 야만과 침략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지켜봅니다. 그리고 독일의 징집요구 최후통첩을 거부한 채 가족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지요.

    이 영화에는 그와 같은 인물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영혼까지 팔아먹은 나치 앞잡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괴벨스의 선동에 속아 철없이 하일 히틀러 외치는 주근깨 청소년같은 이들도 많았지요.

    독일과 같은 언어를 쓰고 한때는 한 나라이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이곳에 직접 오기 전까지는 두 나라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유사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7년 간(1938-1945)의 합병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매우 상이한 본질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36년간 강제합병 상태였던 한국과 일본의 오늘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특히 나치와의 합병과 참전을 하게 된 과정이 자발적, 적극적이었다는 일반적 평가와 달리 수많은 오스트리아 사람들 가슴 속에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은 맥맥이 흐르는 이 나라의 파시즘 경향과 거꾸로 반파시즘 역사의 대립과 극복을 상징하는 영화이기도 했던 겁니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오스트리아가 연합국 분할통치를 겪은 후 평화 지향의 영세중립국으로 동서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벗어났던 것도 필연적 경로였고 말입니다.

    저는 이에 대한 대표적 증거를 빈 중심가(링이라고 부르는) 알베르티나 미술관 앞 광장에서 발견했습니다. 고작 천 평이나 될까 말까 한 작은 광장에 모두 3개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모두가 1988년 오스트리아 조각가 알프레드 허들리카(Alfred Hrdlicka, 1928~2009)가 기획하고 만든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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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광장은 원래 19세기 말엽부터 화려한 아파트가 서있던 필립호프 지역. 그런데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5년 3월 12일 빈에 대대적 폭격이 있었고 이곳에 집중적으로 폭탄이 떨어집니다. 아파트 안에 있던 수백 명의 주민이 폭사했습니다. 신원을 파악할 수 없게 훼손된 시신들이 수없이 발굴되었습니다. 도대체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합니다.

    광장 입구에 서있는 첫 번째 조형물의 제목은 폭력의 문(The Gate of Violence)(사진 3, 4). 두 개의 문설주로 구성된 구조물 앞에는 등에 철망을 두른 할아버지가 엎드려있습니다. 전쟁과 파시즘이 초래한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고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제게는 읽혔습니다. 왼쪽 문설주에는 가스마스크 쓴 군인과 사람의 몸을 사정없이 찌르는 대검.

    오른쪽 문설주에는 나치가 운영했던 최대 규모의 강제노동수용소(concentration camp)인 마우타우젠(Mautausen)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자(최소 12만에서 최대 33만명으로 추정)들의 참혹한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강암 위에 조각된 이들 이미지는 한 눈에 봐도 국가폭력과 파시즘의 죄업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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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조형물은 <하데스로 들어가는 오르페우스>(사진 5). 폭격 희생자와 함께 나치즘에 저항하다 목숨 잃은 오스트리아의 투사들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의 몸이 하얀 라임스톤(lime stone), 즉 죽음의 땅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습니다. 상반신은 이미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의 아래 절반은 사악한 힘이 자신의 의지를 거역하고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에 격렬한 저항을 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짓밟는 자들과 체제에 대한 명백한 항거입니다.

    마지막 조형물에는 <공화국의 돌 : Stone of Republic>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사진 6, 7). 1945년 4월 27일 진격해오는 연합군과 힘을 합친 레지스탕스 세력들이 독일과의 합병을 원천무효화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재건을 선포합니다. 크고 높은 화강암 판면에 공화국 재건을 선포한 수백 명의 이름이 하나 하나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트랍대령 같은 사람들이었겠지요.

    당시 절대 다수의 오스트리아인들이 파시즘에 굴복하였고 심지어 적극 동참했습니다. 새날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악독한 권력이 영구하리라 믿었을 테니 말입니다(일제시대 우리의 상황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3개의 기념비들은 많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물 밑에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새로운 민주적 정부를 구성하는 기초석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뿐이 아닙니다. 프랑스 망명정부와 레지스탕스가 그러했고, 무솔리니를 끝끝내 추적해 거꾸로 매달아 죽인 이탈리아 파르티잔들이 그러했지요. 히틀러라는 근원적 악을 배태시키고 침략의 수족이 된 독일 자체에서부터 지난 70년간 권력을 잡은 것은 좌우를 막론한 반파시즘 세력이었습니다.

    혹자는 마샬정책을 거론하고 유럽에서의 미국의 패권추구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제가 읽어왔고 현장에서 만난 유럽 각국의 또 다른 전후사는(프랑코 독재의 피를 반세기 가까이 적셔온 스페인조차도) 파시즘 반대를 향한 불가역적 투쟁의 역사였고 인민민주주의 심화의 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금융공황과 장기 경기침체 이후 역내에서 심화되고 있는 인종과 종교 갈등이겠지요.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각국에서 싹트고 있는 극우 세력의 준동이 이와 구조적으로 맞물린 현상이고 말입니다. 프랑스 국민전선을 필두로 특히 오스트리아는 극우정당(자유당)의 집권이 어느 나라보다 근접한 곳입니다.

    지난 70년간 유럽에서 숨죽이고 있던 파시즘의 유령이 IS 등과의 종교 충돌과 난민 문제를 기화로 머리를 쳐들고 있는 오늘을, 역사학자들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기간과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참혹한 충돌과 극복의 역사를 지닌 유럽이 어떤 집단지성으로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와 극우세력 대두의 위협을 헤쳐 나갈런지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반면교사가 될지 주목됩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기획전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지닌 곳. 팝아트의 창시자 짐 다인(Jim Dine) 특별전이 열리는 오후의 광장에는 관광객 실은 마차가 무심히 오갑니다(사진 8). 그러한 평화로운 풍광 속 <반전, 반파시즘>을 외치는 조각들 사이를 걸으며 나그네의 생각은 꼬리를 물고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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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김동규
    동명대 교수. 언론광고학. 저서로 ‘카피라이팅론’, ‘10명의 천재 카피라이터’, ‘미디어 사회(공저)’, ‘ 계획행동이론, 미디어와 수용자의 이해(공저)’, ‘여성 이야기주머니(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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