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더 문제,
    F1은 갈 길이 멉니다.
    [왼쪽에서 본 F1] ‘WOMEN IN MOTORSPORT’
        2016년 08월 17일 10:0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최근 몇 달 동안 진보진영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좋든 싫든 가장 뜨거운 논쟁이 이뤄진 것은 ‘젠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논쟁의 전장 한가운데서 싸움을 벌이는 사람이든, 한 발 물러서서 얘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사람이든, 최근의 논쟁이 뭔가 건설적인 토론으로 진행된다고 느낀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상황 속에서 기존의 프레임에 대해서 전혀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갈 길이 참 멀구나.’ 느낀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갈 길이 멉니다.

    그런데, F1의 젠더 문제를 생각하면 이쪽도 참 문제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죠. 자동차와 모터스포츠가 오랜 시간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고, 아직 과거의 프레임을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도 원인이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모터스포츠의 정점에 서 있는 F1은 젠더 문제에서도 가장 심하게 곪아 있는 곳 중 하나랄 수 있습니다. 문제가 큰 것도 문제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더 커 보이기도 합니다.

    F1과 모터스포츠, 자동차 시장 전반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광고에서 남성이 운전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여성은 모터쇼에서 자동차 옆에 서 있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과한 노출을 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죠. 아직도 피렐리 타이어에서 매년 찍어내는 달력을 사겠다고 달려드는 남성 ‘자동차 애호가’들이 즐비합니다.

    심지어 ‘자동차는 더 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회사에서 내놓는 여성 고객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조차, 작고 아담한 차, 실용성이 좋은 차, 핑크빛이나 ‘여성스러운 색상’을 활용한 차를 밀어주는 수준에 머뭅니다. 이런 대책에 뭐가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을 바로잡는 것 역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 정도로 모든 방면에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모터스포츠는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일단 여성 드라이버가 많지 않은 문제라면 약간의 변명은 있습니다. 성을 구분해 치러지는 스포츠 종목이 훨씬 많은 상황에서, 체력적 부담이 상당한 모터스포츠에 성 구분이 없으니 여성 드라이버가 남성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기가 쉽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일리는 있지만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 이런 주장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얘기입니다.

    모터스포츠 이벤트가 펼쳐지는 현장에서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아직 대부분 나라, 대다수의 모터스포츠 이벤트에서, 여성은 ‘그리드걸’이라는 명목으로 ‘레이스의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여성을 ‘레이스 퀸’이니 ‘레이스의 꽃’이니 하고 부르는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레이스에서 여성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문화와 나름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상황이 다를 뿐, 큰 의미에서 접근 방식은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2015 모나코 그랑프리에 등장한 그리드‘보이’

    2015 모나코 그랑프리에 등장한 그리드‘보이’

    불행 중 다행으로 모터스포츠 관계자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F1을 포함해 다수의 세계 모터스포츠 이벤트를 주관하고 있는 FIA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그리드 걸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사용한다는 것, 혹은 그렇게 여겨질 수 있도록 사용한다는 데 대한 문제를 인정합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여성을 들러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만 해도 용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리드걸, 즉 레이스 시작 전 출발 위치(그리드)를 안내하는 팻말을 드는 여성의 등장은 격투기 이벤트의 라운드걸만큼이나 뿌리 깊은(?)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전통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당장은 바꾸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죠. 레이스에서의 그리드걸을 배제하려면, 먼저 프로모터, 즉 현지에서 해당 이벤트로 돈을 벌려는 계약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당장 대중의 인식이 바뀌지 않았는데 제도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행히 FIA가 주관하는 최고 수준의 챔피언십 중 하나인 WEC(월드 내구 레이스 챔피언십)에서는 그리드걸이라는 개념을 퇴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난해인 2015년부터 ‘단일 이벤트로는 세계 최대의 레이스 이벤트’인 르망 24시간을 포함해 WEC를 구성하는 모든 레이스에서 그리드걸이 퇴출됐습니다. 상대적으로 대회의 숫자가 적고 대부분 젠더 문제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공감대가 형성된 서유럽 지역 개최지가 많아, 프로모터를 설득하기가 쉽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F1에서도 간헐적이나마 비슷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WEC에서 그리드걸 퇴출이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15 모나코 그랑프리에는 그리드걸 대신 그리드’보이’가 등장했습니다. 그리드걸 대신 그리드보이가 투입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리드걸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한다는 문제가 논란이 되고 WEC의 그리드걸 퇴출 조치 직후 그리드보이가 투입됐기 때문에 더 많은 이슈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모나코 그랑프리는 F1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만한 ‘둘도 없는 더없이 특별한 이벤트’입니다. 아쉽게도 모나코 그랑프리의 이런 노력은 단편적으로 끝나버렸고, 다른 그랑프리에는 다시 그리드걸이 등장했습니다.

    F1 드라이버의 자리에 가장 근접한 카르멘 호르다

    F1 드라이버의 자리에 가장 근접한 카르멘 호르다

    FIA의 젠더 문제에 대한 대응이 단순히 그리드걸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FIA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캠페인과 활동 중 하나가 바로 ‘WOMEN IN MOTORSPORT’, 즉 모터스포츠에서 여성의 역할 비중을 높이고 실제 참여를 독려하려는 캠페인이 그것입니다.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이 이미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모터스포츠의 전반적인 상황에서 매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에, FIA는 ‘WOMEN IN MOTORSPORT’ 캠페인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적극적인 활동을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고 F1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남성과 동등한 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은 짧은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11개 팀 수석 중 여성 팀 수석은 자우버의 모니샤 칼텐본 단 한 명뿐이고, 사실상 팀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윌리암스의 클레어 윌리암스까지 포함하더라도 두 명에 불과합니다. 기술적인 부문을 모두 책임지는 (남녀의 육체적인 역량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야인) 테크니컬 디렉터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습니다. 미캐닉과 엔지니어를 통틀어도 여성의 비율은 10%를 채우기 어렵고, ‘수석’이나 ‘책임’ 등의 타이틀이 붙은 사람은 없습니다.

    드라이버의 경우는 더욱 요원합니다. 66년 동안 67차례의 F1 챔피언십이 펼쳐지는 동안 40개국에서 모두 846명의 F1 드라이버가 탄생했지만, 이 중 여성 드라이버는 단 다섯 명에 불과했습니다. 산술적인 계산으로만 보더라도 여성 F1 드라이버의 비율은 0.59%에 불과한 것입니다. 게다가 다섯 명의 여성 드라이버 중 F1 그랑프리에서 실제 레이스 스타트, 즉 레이스에 참가한 드라이버는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여성 F1 드라이버가 존재했던 것이 1992년, 마지막으로 여성 F1 드라이버가 레이스에 참가한 것이 1976년이니, 각각 24년, 40년 동안 여성 F1 드라이버는 존재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도 했습니다. 2012년 수지 울프와 마리아 데 비요타 두 명의 여성 드라이버가 테스트 드라이버 또는 개발 드라이버라는 명목으로 ‘미래 F1 그랑프리 출전 가능성이 있는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데 비요타가 2012년 F1 테스트 주행 도중 큰 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고 이듬해 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큰 슬픔을 안겨줬고, 여성 F1 드라이버의 탄생에도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2014년 수지 울프가 윌리암스 소속으로 F1 그랑프리 이벤트의 공식 세션인 프랙티스 세션에 참가해 22년 만에 여성의 그랑프리 이벤트 참가가 이뤄졌으나, 끝내 정식으로 F1 드라이버가 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F1 드라이버의 꿈을 포기하지 않던 수지 울프는 결국 2015년 11월, F1을 목표로 했던 드라이버 커리어의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F1 드라이버를 목표로 한 여성 드라이버 중 가까운 위치에 남아있는 것은 르노의 개발 드라이버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스페인 출신의 카르멘 호르다뿐입니다. 르노에 인수되기 전 독립 팀이었던 로터스 시절인 2015년 계약을 맺었던 호르다는, 2016년 르노 팩토리 팀이 탄생한 이후에도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호르다의 입지가 오히려 여성의 F1 진출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호르다의 드라이버로서의 능력은 F1은 물론 F1의 하위의 하위 카테고리인 GP3에서도 수준 이하로 평가받고 있어, 현실적으로 F1 레이스카를 몰 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GP3에서 세 시즌 동안 레이스 최고 성적은 13위로 단 1포인트를 얻지 못했으니, GP3 챔피언도 GP2에서 평범한 수준이 되고 F1까지 훨씬 높은 장벽이 남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호르다에게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호르다의 외모가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준수한 수준이기 때문에, 르노와 로터스가 그녀의 외모를 이용하기 위해 계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로터스, 혹은 현재의 르노가 그녀를 ‘그리드걸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호르다가 스스로 이와 같은 비판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위 카테고리에서라도 실력을 제대로 보여줘야 하겠지만, 현재 그녀가 참가하고 있는 ‘의미 있는 수준의’ 챔피언십은 없습니다. 심지어 FIA의 WOMEN IN MOTORSPORT 캠페인 측에서도 그녀를 마케팅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남길 정도였으니, 더이상 호르다의 F1 도전에 긍정적인 평가는 남지 않은 셈입니다.

    결국 드라이버로서의 참가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F1과 여성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남아있다거나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밖에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여성의 미캐닉과 엔지니어로서의 참여 역시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에서 봤을 때 평균적인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습니다. 게다가 F1 관계자 중 일부, 팬들중 다수는 아직 마초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노력도 헛됐다고는 평가할 수 없지만, FIA와 F1이 앞으로 해야 할 노력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비판이 따릅니다.

    F1과 여성, 그리고 젠더 문제. 아직 풀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고, 갈 길이 너무나 멉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불거진 젠더 문제와 비교해 어느 쪽 상황이 더 나으냐 따질 것도 없습니다. 모두 하염없이 멀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어쨌든 가야 할 길입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