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二‧異)민족주의
    동맹과 공존을 위하여
    [책소개]「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주디스 버틀러/ 시대의창)
        2016년 08월 13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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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을 고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젠더 트러블》의 저자,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가이자 철학자로 평가되는 주디스 버틀러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오늘날의 국제적 민족 분쟁에 정면으로 도전한 책을 냈다. 유대계 미국인인 버틀러는 이 책에서 반유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시온주의를 비판하고 현대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에 저항할 길이 있음을 입증한다.

    그녀는 유대인 지식인인 에마뉘엘 레비나스.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프리모 레비의 글을, 팔레스타인 지식인인 에드워드 사이드.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사유로 걸러내어 변증법적 대안을 제시한다. 버틀러가 한나 아렌트에게서 끌어온 동거(cohabitation: 함께 거주함) 개념, 곧 지상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적대와 갈등을 동반한다. 그렇게 서로 부딪히면서, 슬퍼하면서, 함께 살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목표를 아무도 사유하지 않는 세계는 끔찍하기에,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임무라고 그녀는 호소한다.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을 비판한다는 것

    이 책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포함해 버틀러가 세계 곳곳에서 강연하거나 발표한 글들을 발전시켜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곧 이 책은 시간을 거치고 세계를 횡단하며 거듭 재구축된 사유의 묶음이다.

    미국에서 “당신은 시온주의자인가요?”라는 질문은 대체로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믿나요?”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믿는다는 말은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정초 이념(‘이스라엘은 유대인 주권 국가다’)과 정책(자기방어라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추방.분리.봉쇄.폭격하는)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교 회당에 다니는 사람은 다 시온주의자라고 믿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이스라엘의 국가 정책을 지지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유대성을 부인하는 유대인들도 있다.

    <서문―자기탈피, 추방, 그리고 시온주의 비판>에서 버틀러는 유대성을 부정하지 않고 시온주의를 비판할 수 있고, 유대 전통 안에서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비판할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근거를 찾는 데서 그친다면 유대의 전통 안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배타적 윤리 프레임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번역’에서 출구를 찾는다. 이 책의 2~7장은 레비나스, 벤야민, 아렌트, 레비에게서 찾아낸,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비판할 유대적 출처를 버틀러가 그 유대성의 울타리 너머로 ‘번역’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적 출처에서 ‘파생된’ 개념이라 해도 더 널리 소통 가능해지고 공동체주의communitarian 프레임(종교적이거나 민족적인) 바깥에서도 타당성을 갖추려면 그 개념은 번역되어야 한다. …… 이는 전통이 스스로에게서 거듭 반복해서 벗어남을 통해 스스로를 확립하며, 출처는 우선 번역과 전이가능성의 장으로 들어가야만 윤리적 목적에 ‘쓸모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어떤 출처가 현재 안에서 벼려지거나 빛을 발하려면 어떤 시간적 궤도를 거쳐야 한다. (…중략…) 과거의 윤리적 출처는 오직 ‘토대를 양도할’ 때에만, 사회적 유대나 지리적 공간 자체를 재배치하는 것이기도 한 문화적 번역 과정의 일부로서, 윤리적 요청들을 수렴하고 겨루는 가운데 다른 어딘가에서 새롭게 번성할 수 있다는 의미다. (25~26쪽)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함께 거주하는 민족들, 이二민족주의 혹은 이異민족주의 동맹을 위하여

    <1장 불가능한, 필요한 과제―사이드와 레비나스, 그리고 윤리적 요구>에서 버틀러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기 저작 중 하나인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을 읽은 것은 내게 놀라운 경험이자 선물이었다”(61쪽)고 고백한다.

    야훼 하느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의 시초에는 모세가 있다. 그런데 사이드는 유대성의 시초가 되는 모세가 실은 이집트인이었다는 사실을 짚는다. 그리고 집에서 쫓겨나 사막에서 방랑하는 삶, 곧 디아스포라가 유대인 삶의 특성임을 환기한다. 이에 버틀러는 유대인이란 비유대인과 상관없이 정의할 수 없는 범주라고 주장한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에 대한 물음이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은 ‘추방’이라는 실존적 특성을 공유한다. 버틀러는 권리와 땅을 박탈당했던 유대 민족의 경험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이들과 연합할 것을 역설한다.

    <2장 죽일 수 없는―레비나스 대 레비나스>에서는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활동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5~1995)가 말한 타자의 윤리, 책임 윤리를 주로 다룬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내게 무슨 일을 했건 여전히 내게 윤리적 요구를 하는 사람이고, 내가 반응해야 할 ‘얼굴’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결코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반응해야 하고, 나를 죽일지 모를 사람 앞에서도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무조건적인 명령을 내린다. 내가 타자에 대해 짊어지는 무제한적인 책임은, 계명에 따른 두려움과 나의 실존을 위해 타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 사이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투쟁의 결과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얼굴이 없다고 주장했다. 버틀러는 레비나스가 윤리적 반응의 진원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을 특정한 민족에게만 배제한 것을 비판하며, 우리에게 인종주의자 레비나스를 책임지면서 윤리학자 레비나스에게 반응할 것을 설득한다.

    <3장 발터 벤야민과 폭력 비판>과 <4장 섬광―벤야민의 메시아 정치>에서는 20세기 전반 독일의 가장 중요한 문학비평가이자 사상가로 꼽히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전기前期 논고 <폭력 비판>(1921)과 그의 생애 마지막 논고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벤야민은 국가란 법적 폭력으로서 출현하고 유지되며, 승자들이 목적론적으로 구성한 역사(승자의 진보로 구성된 역사)는 피억압자들의 역사를 삭제해왔기에, 법적 폭력을 통해 진보하는 역사와 단절할 것, 지금 여기에서 피억압자들(단수가 아니라 복수다)의 역사를 구성할 것, 곧 진정한 비상사태의 도래를, 따라서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을 요청한다. 이에 버틀러는 구원이란 “귀환이 없는 추방, 목적론적인 역사의 파열, 수렴하면서 방해하는 일군의 시간성들로의 개방으로 재고되어야 한다”(233쪽)고 우리를 설득한다. 말하자면 구원은 특정한 정체성에 따라 국가를 세우고 이질적인 것을 몰아내 단수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유랑하면서 복수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5장 유대주의는 시온주의인가?-아렌트와 민족국가 비판>은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전체주의의 기원》을 비롯한 저작에서 천착한 무국적자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아렌트는 민족국가의 성립 결과, 민족으로 인정되지 못한 이들의 강제 추방과 무국적자의 대량 양산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아렌트는 1930년대에 시온주의를 지지했지만,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대 주권성에 정초한 이스라엘 건국보다 유대-아랍 연방 국가 방안을 더 선호하게 된다. 아렌트는 국가를 이룰 각 민족에 주권을 분배하는 것이 아닌, 공통의 정책과 법을 만들 복수성複數性의 연방을 구상하면서 주권의 복수성을 주창했다. 아렌트에게 복수성이란 이질적인 인간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무선택적’ 특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선택한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다. 저들도 결코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6장 복수複數의 곤궁-아렌트의 동거同居와 주권성>에서는 수많은 오해를 낳았던 한나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분석한다.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발표된 뒤 시온주의자 게르숌 숄렘은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며 한나 아렌트를 비난했다. 이에 대해 독일 유대인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때까지 무국적자이자 난민으로 살았던 아렌트는 자신은 어떤 ‘민족’도 사랑한 적이 없으며 오직 ‘사람들’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아렌트가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이른바 ‘최종 해결책’)에 가담한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최종 해결책’에서 맡은 역할은 우연이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기에 잠재적으로 거의 모든 독일 사람이 당신과 똑같이 유죄라고 …… 말했다. 당신이 말하려고 한 것은 모든, 거의 모든 사람이 유죄이고 죄 없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EJ, 278). 그 뒤에 아렌트는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복수형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것은 평범한 결론일 테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기꺼이 수여할 만한 결론은 아니다.” 그 뒤에 아렌트는 이렇게 덧붙인다. “설사 독일인 8000만 명이 당신처럼 했다고 해도, 그것이 당신을 위한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EJ, 278). (299쪽)

    아렌트가 보기에 근본적으로 학살을 용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사실 우리는 지구상에서 누구와 함께 살아갈지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인구가 항상 우리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들은 항상 복수이고 여러 언어를 사용하고 공간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어떤 특정한 인구도 지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지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학살 정책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는 무의지적 근접성과 무선택적 동거가 우리 정치적 실존의 전제 조건임을 의미하며-이 사실은 아렌트가 민족국가(그리고 그것이 가정하는 동질적인 국가)를 비판하는 데 토대가 된다-, 또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인구를 위해 평등의 양태를 확립한 정치체 속에서 지구상에 살아갈 의무를 함의한다. (52쪽)

    사회적 복수성과 동거는 우리 모두의 선택과 의지에 앞서 존재한다. 그런데 나치와 아이히만은 자신들이 동거할 사람과 동거하지 않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아렌트는 누군가와 지구를 공유하지 않으려 한 아이히만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7장 프리모 레비와 현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로서 증언문학(평론가 헤이든 화이트의 표현에 따르면 ‘목격자 문학’) 활동을 해온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싸움을 다룬다. 레비는 유대인 말살을 꾀한 수용소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강제수용소의 실재를 설명하는 한편, 홀로코스트(히브리어로는 ‘쇼아’)라는 정신적 외상을 정치적으로 착취, 악용하는 시온주의자들과도 싸웠다.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해 베이루트를 포위하자,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은 “나는 마치 벙커의 히틀러를 쓸어내기 위해 베를린에 군대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나치에 비유한 것이다. 이에 레비는 이렇게 행동한다.

    1982년 아우슈비츠를 다시 방문하기 위해 출발하기 전날 밤, 그는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할 것을 호소한 《라 레푸블리카》의 공개서한에 서명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가 박해받는 소수를 대표한다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박해의 담론은 그런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수용소의 이미지를 되살려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려 한 사람들에게 반대하면서 레비는 《일 마니페스토》에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문장을 썼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유대인이다. 그리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유대인이다.” (375쪽)

    <8장 “추방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사이드와 다르위시, 미래에 말을 걸다>는 이 책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정체성이 요새나 참호가 아니라 복수성으로 열리는 곳’이란 다르위시의 시구로 시작하는 이 장은 현재 두 민족(실상 두 민족 다 결코 단일하지 않다)이 비참하게 공존하는 역사적 상황(‘이민족주의의 비참한 양태’)을 규명한 뒤, 두 민족이 비참하지 않게 동거하는 이민족주의 체제의 길을 열어 보이고자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1941~2008)의 시 <에드워드 사이드: 대위법적 독서>를 분석한다. 이 시는 다르위시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죽음에 대비해 쓴 것이다.

    정체성은 어떻고요? 내가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자기방어입니다……
    정체성은 출생의 아이지요, 그러나
    결국에 그것은 자기발명이지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나는 여럿입니다……
    내 안에는 늘 새로운 바깥이 있어요. 그리고
    나는 희생자의 질문에 속합니다. 내가
    거기에 없다면, 나는 은유의 사슴에게 먹이를 주려고
    마음을 단련했을 텐데……
    그러니 당신이 어디로 가건 고향을 갖고 다녀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르시시스트가 되세요
    바깥세상이 추방이고,
    추방은 세상 안입니다.
    그리고 그 두 세상 사이 당신은 무엇입니까? (403~404쪽)

    “그는 말한다: 나는 거기 출신이고, 나는 여기 출신이지만 나는 거기에도 여기에도 있지 않다.”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국가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확실하다.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확실하다. 남부 레바논의 난민수용소에 있는-그렇다. 추방은 분리의 이름이지만, 동맹은 바로 그곳, 아직은 장소가 아닌 곳, 아직은 아닌 불가능한 장소였고 지금도 그런 곳,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서 발견된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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