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노동당 대표 선거,
    제레미 코빈과 좌파들
    벤좌파의 후예와 노동당 혁신 운동
        2016년 08월 12일 10: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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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레미 코빈이 작년 예상을 뒤엎고 노동당 대표에 당선된 날, 맥주 집에서 조촐한 자축 뒤풀이가 열렸다. 연설을 하던 코빈은 조금 전, 선물로 건네받은 한 장의 티 타월(Tea Towel)을 아무 말 없이 들어올렸다. 당원들은 조용히 티 타월에 새겨진 사람과 글귀를 응시했다.

    “희망은 진보의 연료이고, 두려움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토니 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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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헌4조와 공공소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베반주의자’(Bevanites)들

    1950년 겨울, 토니 벤(Tony benn)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크립스(Stafford Cripps)의 브리스톨 선거구를 물려받아 보궐선거를 통해 25살의 나이로 당선됐다. 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하원의원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흔히 말하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한때는 좌파의 맹장이었지만 이때는 굳건한 현실주의자로 변신한 크립스의 선거구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벤에게서 아직은 좌파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의 첫발은 순조로웠지만 당은 총선 결과를 놓고 격렬한 내홍이 시작되고 있는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 전 총선에서 과반에서 80석 가까이 상회하던 의석수는 과반을 불과 5석을 넘기는 불안한 승리에 그치자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총리는 갑작스런 우회전을 결행했다. 재무장관에 휴 게이츠켈 (Hugh Gaitskell)과 외무장관에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을 임명한 것이 우회전의 신호탄이었다. 2년 전, 보건장관을 맡아 마침내 국민건강서비스(NHS)를 탄생시킨 좌파의 상징 니어 베반(Nye Bevan)을 노동장관으로 이동시킨 것은 좌파들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이듬해 예산 편성을 하면서 우회전의 실체가 드러났다. 애틀리 총리과 게이츠켈 재무장관은 국방예산을 대폭 늘리고 NHS의 예산은 줄이는 안을 들고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예산의 증액 이유로는 한국전쟁이 알리바이로 등장했다. NHS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베반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베반은 즉각 장관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맞섰으며, 두 명의 좌파장관들도 뒤따라 사임했다. 베반이 사임하자 당내에서는 그들 중심으로 한 ‘좌익 고수’(Keep Left)그룹이 지구당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다가오는 당 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현직 총리를 상대로 당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 대회를 앞두고 좌파들의 회합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베반주의자’(Bevanites)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카드를 애틀리 총리가 꺼내들었다.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1951년 조기총선은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했다. 악화된 국제수지와 물가상승을 놓고 보수당은 ‘노동자와 서민의 위기’를 강조한 반면, 노동당은 냉전의 도래와 국방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캠페인에 주력했다. 마치 양당이 뒤바뀐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선거전이었다. 데일리 미러조차 노동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애틀리 총리는 무엇에 취한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선거과정을 돌이켜볼 때, 노동자와 서민의 노동당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노동당이 스스로 자멸했을 뿐이었다.

    선거는 보수당의 승리로 끝났고 노동당은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이 처칠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기초한 국가 개조와 광범위한 복지국가라는 기획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기간 동안 당의 우파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기획을 실행하지 않기 위해 갖가지 이유를 대는데 여념이 없었다. 복지국가 기획을 사보타주 한 것은 보수당이 아니라 노동당의 우파들이었다. 조기총선에서 빨간색을 지우는데 급급한 캠페인을 주도했던 모리슨과 달톤(Hugh Dalton)은 여전히 건재하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느슨한 회의체 성격이 짙었던 좌파들은 ‘좌익 고수’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베반좌파에 합류한 의원들은 50여명에 달했으며, 해롤드 윌슨 같은 거물급들이 참여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좌파들이 선택한 것은 거리정치였다. 윌슨과 리차드 크로스만을 앞세운 전국 순회강연의 단골메뉴는 ‘공공소유’에 대한 것이었다. 공공소유야말로 베반좌파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냉전정치의 청산과 친미(영국 노동당)·친소(영국 공산당)을 벗어나 새로운 외교노선을 주창하는 것은 베반의 몫이었다. 전국 순회강연에 당원과 국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베반좌파들이 겨냥한 것은 당 대회였다. 1952년 모아캄 당 대회에서 좌파들이 노린 것은 전국집행위원회(NEC)의 선거였다. NEC는 여당일 경우는 식물기구에 불과하지만 야당일 경우는 당에 개입할 권한이 강력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당 대회 마지막 날 실시된 선거에서 윌슨과 크로스만이 위원으로 선출되고, 애틀리에 이어 차기 지도자로 지목되던 모리슨과 달톤이 낙선함으로서 좌파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3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위원직을 유지해왔던 모리슨으로써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베반은 부대표 선거에 도전했다. 하지만 의회노동당이 선출하는 부대표 선거에서 베반은 모리슨에게 완패했다. 후퇴를 모르는 이 도도한 좌파, 베반은 변하지 않는 의회노동당에게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4년 베반은 당의 외교노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독단적으로 예비내각을 사임했다. 사임한 예비내각의 자리를 윌슨이 차지하며 전열을 이탈해버렸다. 두 번의 사임도 문제였지만 좌파들과 상의조차 없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베반은 정치력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베반좌파는 고립되어갔다. 1955년 총선에서도 패배하자 애틀리는 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의회노동당이 선택한 인물은 베반은 물론 모리슨도 아닌 게이츠켈이었다.

    당권을 장악한 게이츠켈은 뿌리째 당의 우회전을 주도했다.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의 1950년대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안소니 크로슬랜드(Anthony Crosland)의 《사회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Socialism)가 대표적이었다. 요컨대 국유화와 공공소유는 더 이상 노동당의 것이 아니며 총수요로 대표되는 케인즈주의가 새로운 희망이라는 선언이었다. 재집권만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당의 분위기에 좌파들은 무기력했다.

    1959년 선거에 또다시 패배했을 때, 게이츠켈은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당에 남아있는 ‘사회주의 잔재’들을 색출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 희생양으로 지목된 것은 국유화와 공공소유를 명시하고 있는 <당헌 4조>였다. 하지만 <당헌 4조>를 삭제하기 위한 블랙풀 당 대회는 게이츠컬의 패배로 끝났다. 여전히 당을 지탱하는 근간인 노동조합들은 누구보다 민영화의 폐해를 몸으로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반은 “국유화가 틀린 것인가, 선거패배가 두려운 것인가”라고 마지막 사자후를 토하며 <당헌 4조>야말로 노동당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해 겨울, 13살부터 탄광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했던 불굴의 좌파, 니어 베반이 세상을 떠났다.

    토니 벤, 영국 역사상 최초로 귀족세습을 거부하다

    1961년 봄에 실시된 브리스톨 보궐선거는 노동당이 토니 벤을 공천한 것을 놓고 시작도 하기 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집권 보수당은 ‘의회정치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고, 보수언론들도 연일 노동당을 비난하는 기사로 지면을 장식했다. 노동당의 기관지라고 불린 데일리 미러(Daily Mirror)조차 이 난감한 상황에 팔짱낀 태도의 기사들을 내보내며 한발 물러섰다.

    명문가인 토니 벤의 아버지가 자작이라는 귀족 칭호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1950년 보궐선거로 원내에 진출한 토니 벤은 1년 만에 의회를 해산한 탓에 이듬해는 벌써 재선의원이 되었다. 당은 좌·우파의 대립으로 연일 격론이었지만 벤은 특별히 우파의 편들 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좌파를 엄호하지도 않았다.

    벤이 얻은 첫 닉네임은 연성좌파(soft left)였다. 1959년 선거에서 4선에 오른 벤은 이듬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의회에서 축출됐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자작 지위를 계승해야 했고, 귀족법(Peerage ACT)에 따라 벤은 상원의원이 된 것이다. 그것은 곧 하원의원직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은 차남이었는데 2차 대전 당시 형이 사망함에 따라 그 지위까지 자동승계하게 되면서 하원의원직을 박탈당한 것이다. 날벼락이었다.

    벤은 귀족 승계를 거부한다고 선언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벤이 향후 50년간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멈추지 않았던 ‘거리정치’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벤은 거리에서 구시대의 유물인 귀족 칭호와 세습에 대해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구시대의 유물을 계승할 생각이 없으며 봉건주의의 잔재인 귀족법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승계를 결정할 수 있도록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들은 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리에서 토니 벤은 좌파로 거듭났다. 보궐선거가 시작되자 지역구 당원들은 벤을 재차 후보로 선출했다. 당선되더라도 당선 자체가 무효인, 정당사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선거에서 민중들은 벤을 재차 선택했다. 당연하게도 귀족법에 따라 벤은 하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6번 당선되었지만 15선 하원의원이라는 진기록은 그렇게 탄생했다.

    벤은 다시 거리로 돌아갔다. 2년간의 거리정치는 그에게 “때로는 의회가 아닌 곳에서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계기가 됐다. 2년 후 귀족 승계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귀족법이 개정되었다. 벤은 법이 통과되자마자 자작 지위를 내던졌다. 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13년 만에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과반을 가까스로 넘긴 불안한 집권이었다.

    베반좌파를 배반했던 윌슨이 총리에 올랐으며 좌우를 골고루 내각에 기용하며 분란을 사전에 잠재웠다. 거리에서 스타 정치인이 된 벤은 체신장관에 올랐다. 윌슨 총리는 집권 2년 동안 “정치가 실종된 것 같은 정치”로 일관했다. 노동당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정당이라는 신호가 성공했는지 윌슨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윌슨은 조기총선을 선택했으며 노동당은 기록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작은 희망이라면 의석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급진적인 젊은 의원들이 당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토니 벤은 여전히 윌슨에게 비판적이었지만 급진좌파들과 행보를 함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왼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970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4년간 인플레를 잡는다고 긴축과 임금통제 등을 추진하며 노동자의 기대를 저버린 대가였다. 노동자들과 좌파들은 당을 압박했고, 1974년 선거에서는 전후 가장 급진적인 선거강령인 이른바 ‘사회주의강령’이 마련됐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간산업의 공공소유로 전환이었다. 당의 우파들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아직은 당의 대주주인 노동조합의 엄호와 좌파들의 노력으로 선거강령은 당 대회에서 확정됐다. 선거는 불안한 의석이었지만 노동당의 승리로 끝났다.

    윌슨 총리는 내각에 좌우 균형을 추진했다. 재무장관 등은 우파에게 돌아갔지만 산업장관에는 토니 벤, 고용장관에는 베반좌파의 후예 마이클 후트가 차지했다. 윌슨의 목적은 이전에도 그런 것처럼 집권한 이후에는 ‘평온한 정치’를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거강령에 따라 집권한 윌슨이 공공소유의 주무부서인 산업장관을 우파의원으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벤을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은 최소한의 타협이었다. 하지만 토니 벤은 이 사회주의강령의 실행을 진지하게 추진하면서 윌슨의 기대를 가볍게 저버렸다. 얼마 후, 윌슨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벤을 다른 내각으로 이동시키면서 사보타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총선 전, 보수당은 유럽경제공동체(ECC)에 가입했다. 노동당의 우파는 ECC 가입을 지지하는 입장인 반면, 좌파들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노동당의 총선 공약에는 ECC의 탈퇴가 포함되어 있었다. 거리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배운 토니 벤은 당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의회노동당에 호소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난 노동계급은 ECC 가입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니 벤이 꺼낸 카드는 단 한 번도 실시된 적이 없는 국민투표였다. 국민에게 물어보자는 벤의 주장은 우파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ECC 탈퇴를 둘러싼 영국 최초의 국민투표는 67%가 반대함으로써 참담하게 막을 내렸다. 훗날 토니 벤은 “(노동계급과 민중)의 그런 선택에서 여전히 배우는 중”이라며 아쉬운 소회를 밝혔다.

    노동당의 좌파(경향)가 전진하는 동안 ‘자발적인’ 두 개의 조직이 탄생했다. ‘노동당민주화운동’(CLPD)와 ‘노동당조정위원회’(LCC)였다. 전자는 평당원 민주주의에 입각해 당의 민주주의를 아래로부터 회복하자는 입장이었으며, 후자는 기초활동가 중심으로 교육과 거리선전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두 그룹의 공통점은 ‘당원 중심’이었다. 두 그룹이 통합해 ‘풀뿌리운동위원회’(RFMC)가 탄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벤 좌파가 탄생한 것이다. 수십명의 의원을 회원으로 가진 의회급진좌파 <트리뷴>과 벤 좌파의 차이는 당원에 기반하는가 하는 것이 출발점이자 차이점이었다.

    1979년 선거에서 패배한 후, 벤 좌파의 전당적인 노력으로 당 대표단은 의회노동당(하원의원 선거)이 아닌 당 대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쉽게 말하자면 노동조합 얼마, 당원 얼마, 의회노동당 얼마 이런 비율로 당 대표를 선출하기로 한 것이다. 토니 벤의 당 대표 당선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아래로부터 도도한 병력을 가지고 전진하는 좌파가 더 위험한 것일까.

    총선 패배로 어차피 사퇴해야 할 캘러한은 곧바로 사퇴했다. 아직은 당규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대표선거는 여전히 하원의원들만의 선거였다. 우파들은 선거를 시작하기도 전에 <트리뷴>그룹에 연서를 띄웠고, 급진좌파 <트리뷴>그룹의 마이클 풋이 당 대표로 선출됐다. 당규가 마련되고 토니 벤은 형식적이지만 당의 2인자인 부대표 선거에 나섰다. 우파들은 데니스 힐리를 내세우며 당내 교두보를 유지하려고 분투했다. 토니 벤은 당 대회에서 미세한 차이로 우파의 힐리에게 부대표를 내주었다. <트리뷴>의원들은 선거에서 기권했다.

    1983년 선거는 노동당의 참패였다. 토니 벤은 선거구 조정에서 선거구가 사라졌다. 자칭 급진좌파인 지도부는 토니 벤 선거구 조정에 뒷짐을 지었다. 듣도 보도 못한 선거구에 출마한 토니 벤은 낙선했다. 벤 좌파는 흔들렸지만 또 다른 지도자 켄 리빙스턴(전 런던시장)이 굳건하게 원내외를 아우르면서 전진했다. 벤은 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하원으로 돌아와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1980년 후반, <트리뷴>그룹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집권만을 위한 당의 우경화는 좌파들이 감내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도도한 보수당의 대처 총리 등장에 노동당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벤 좌파는 조금씩 후퇴했고, 블레어의 등장 이후에는 한줌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내 긴 대처의 보수당 정권을 끝내고 노동당의 블레어가 총리에 올랐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보수당 정권이 마무리하지 못한 ‘신자유주의 전도사’였다. 블레어가 가장 먼저 한일은 <당헌4조>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당내에서 좌파는 희귀동물이었다.

    2001년, 토니 벤은 웨스트민스터를 떠났다. 스스로 하원의원을 그만두었지만 그는 다시 거리정치로 돌아왔다. 거리정치의 맨 앞에는 언제나 토니 벤과 켄 리빙스턴이 자리했다. 2014년 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세인트마거릿성당에 마련된 장례식장에는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생전에 벤을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우파신문 텔레그래프는 벤을 역국에서 ‘가장 신랄한 국가보물(most trenchant national treasure)’이라는 헌사를 내보냈다. 블레어와 브라운 총리는 떠났지만 노동당은 여전히 노동당이 아니었다.

    당원과 노동조합의 지지를 통한 의회노동당의 혁신운동

    국민투표에서 예상을 뒤집고 브렉시트가 현실화되자 노동당의 우파의원들은 당의 지지기반 지역에서도 찬성표가 높게 나온 사실을 들어 제레미 코빈 대표의 불신임을 추진하고 나섰다. 국민투표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던 토니 벤에 이어 벤좌파의 후예가 정치생명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의원총회에서 제레미 코빈 대표 불신임에 찬성한 의원은 172명이었고 반대한 의원은 고작 40명이었다. 불신임은 당규에 규정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구속력은 없었다. 코빈은 대표직을 계속 유지한다고 선언하며 불신임안을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과반수 이상의 요청이 있을 경우 대표선거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또 당원투표에 대표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230명의 하원의원과 20명의 유럽의회의원의 20%, 즉 최소 50명 이상의 추천이 필요하지만 코빈을 지지하는 의원은 그보다 적었다. 코빈은 현직 대표는 재추천을 받을 필요가 없다며 전국집행위원회(NEC)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노조 지도자와 좌파가 우세한 NEC는 18대 14로 코빈의 손을 들어주었다.

    우파의원들이 불신임을 추진하는 동안 코빈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한 6만 명의 신규 당원이 당으로 몰려들었다. 출마를 선언했던 안젤라 이글은 무명의 오웬 스미스를 지지한다고 발표하고 출마를 포기했다. 영국언론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코빈과 스미스의 격차는 30% 이상이며 그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좌파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입당운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선거는 무의미해진 상태다. 블레어에 실망해 당을 떠났던 대규모의 노동자들이 다시 당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unite

    Unite Union은 영국의 최대산별노조다.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 산별노조와 달리 조합원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노조이기도 하다. Unite Union에는 Unite Left라는 활동가조직이 있다. 전국에서 노조를 조직하고 기금을 조성해 상근자를 배치하는 Unite Left는 “정치에 참여하는 노조”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노동당의 지지기반이 취약한 곳에서 후보를 발굴하고 기금을 조성하며 조직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25명의 하원의원이 Unite Left의 지원으로 당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테면 노동당의 좌익화가 이들의 목표인 셈이다.

    노동조합의 지원으로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지만 코빈은 영국 전역을 돌며 거리정치를 계속하고 있다. 대표선거를 마치 총선처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은 노동자와 당원을 통해 당을 혁신하려던 토니 벤의 노력과 완전히 닮아있다. 의회노동당을 아래로부터(당원), 당의 밖의(노동자와 지지자) 힘으로 당을 혁신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차기 총선까지는 아직도 긴 시간이 남아있다. 최근에 있었던 ‘트라이던트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의회표결에서 불과 47명의 의원만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은 의회노동당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해준 사례였다. 하지만 코빈이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당원뿐만 아니라 당 밖에 있는 노동조합의 강력한 엄호가 가장 큰 힘이다. 벤좌파 후예의 당 혁신운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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