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 메갈리안들이 가리키는 것
    [기고] 여성혐오를 반대한다는 것의 의미
        2016년 08월 03일 10: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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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갈리아는 어디에나 있고, 언제라도 있을 것이다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사건 정황을 파악할 때, 피해 여성보다는 가해자 남성을 ‘상식적인’ 대화의 파트너로 삼는 일이 종종 있다. 남편의 폭력과 협박에 제압당한 여성은 믿을만한 외부의 개입자가 나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마구 쏟아내고, 때로는 가해자 남편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저항하기도 한다.

    가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어느새 ‘착한 시민’인 척 하는 남성의 ‘합리적’ 언사는 피해 여성의 ‘미쳐 날뛰는’ 격정적 호소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현상적으로만 보자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형국이다.

    수많은 피해 생존자들의 용기 있는 말하기 덕분에 가정폭력은 칼로 물 벨 싸움이 아니라 공적인 정의로 다뤄야 하는 의제가 되었다. 그러나 특정한 성별이 폭력 피해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는 지표의 의미를 우리 사회는 여전히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유지해서 피해자성을 참작하는 태도가 만연한 것이 그 증거다. 속절없이 당하고, 피 흘리고, 고통 속에 침묵해야 한다. 이런 피해자다움의 통념을 따르지 않는 여성은, 말하자면 가정폭력의 메갈리안이다. 성폭력의 메갈리안들도 있다.

    나 여러 여자 따 먹었어 라는 말처럼 여자들도 나 여러 남자 따 먹었어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에이 씨, 그래도 저 좀 따먹고 헤어졌으니 다행이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 ID: 숲****, “tamara님…..”, 2001. 01. 05.)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성적 엄숙주의와 경건주의가 만연하는 아주 숨 막히는 성적 이중성을 재생산할 뿐이다. (ID: 천****, “백인위 파쇼와 싸우다 파쇼를 닮아가는가??”, 2000. 12. 30)

    15년 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온라인 게시판(진보네트워크 참세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100인위는 조직 보위 논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은폐되어온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를 가해자들의 실명을 공개하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제기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성활동가들의 절대 절명한 생존권과 시민권의 문제임을 호소하면서 올바른 해결을 촉구했지만 늘 거부당한 뒤다. 이에 대해 다수의 남성들이 비난하고 훈계한 골자는 이렇다. 여성도 남성을 ‘따 먹으면’, 혹은 ‘따 먹었다고 하면’ 될 일을, ‘성적 엄숙주의’에 빠져 ‘파쇼’가 되었다는 거다.

    한국 사회에서 메갈리안들을 향한 공격의 방식은 놀랍게도 일관되어 있다. 저항과 규칙의 마지노선을 남성들이 정한다. 불만 있으면, ‘나도 여러 남자 따 먹었어’로(만) 응대하라는 것이다. 남성들이 정한 규칙이 불공정하며, 남성들의 상식은 여성에게 부당한 방식으로만 짜여 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려 처단되기 바쁘다. 메갈리아를 ‘페미 나치’, ‘파쇼 페미니스트’로 공격하는 광기에서 그 기시감을 확인하시라.

    주의할 것은 메갈리안들 역시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100인위 당시 여성들은 ‘나 여러 여자 따 먹었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남성들로부터 여성들이 느끼는 모욕감을 공감시키려 애썼지만 대개는 실패했다. ‘씹치라 따 먹을 것도 없다’고 돌려주면 그 기분을 알겠냐고 해야 정확했겠지만, 그러지 못 했거나 안 했다. ‘김치녀는 삼일한 해야 한다’는 남성들에게 ‘한남충은 숨쉴한 해야 한다’로 응전한 여성들은 그렇게 했다.

    군 가산제 논쟁에서 촉발되어 모든 여성들을 파렴치범으로 모는 공세가 시작된 지 15년, ‘된장녀’ 담론이 나타난 시기로 치자면 10년, 일베의 역사로 추산해 짧게 잡아도 지난 5년간, ‘여성혐오’로 수렴되는 온라인 세계의 공격적 남성성에 폭격당한 여성들이다.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성차별, 성폭력, 성불평등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일베는 어디에나 산재한다. 일베가 아닌 형태로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기에 ‘어디에도 없다’. 메갈리안들 역시 무수히 있어왔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보편자 남성의 세계에 파열구를 내보려는 여성들의 행동은 늘 가시적일 수밖에 없다. ‘돌출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병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여자들이 왜 이렇게 갑자기 미쳐 날뛰지?’

    ‘반메갈주의’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메갈리안들의 ‘뜻밖의’ 외침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생산적인 토론 과제를 정식화 하는 것이야말로 젠더를 다루는 실력과 관계된다. 물론 메갈리안들이 복수적인 만큼 이 행동들에 대한 의미와 시사점은 다면적으로 접근될 수 있다.

    메갈리아의 경우 온라인 행동주의가 그 폭발력만큼이나 자기 한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지를 논점 가운데 하나로 부각시킨다. 메갈리아는 1, 2, 3, 4에서 워마드에 이르며 증식, 분열, 파생하면서도 소위 ‘미러링’을 통한 온라인 행동주의를 가장 선명하게 표방한 집단이다. 사실 ‘미러링’이라 일컬어지는 패러디를 통한 풍자는 메갈리아에서 처음 비롯된 것도 아니고, 온라인에서만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패러디를 통한 풍자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시간의 경계를 갖고, 분명한 대상을 구획 지을 때 그 폭발력이 있다. 익명의 평등주의에 기반한 온라인 플랫폼, 현실과 아이디 정체성의 간극과 균열, 정치적 공론장의 취약함과 복잡하게 연결된 온라인 행동주의는 자칫 애초의 정치적 목표를 통제하기 어려운 매커니즘을 갖고 있다.

    촌철살인의 카타르시스는 둔화되고 메시지와 그 수신처는 축소, 왜곡되기 쉬운 것이다. 마치 맥락을 상실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어린이, 이주자와 같은 비주류 집단을 배제하는 논리와 실천들을 구조적으로 성찰하는 힘을 부여해주는 대신, ‘영혼 없는’ 구호의 복제물들만 난무해진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불의와 불평등에 저항하는 온라인 행동주의를 둘러싼 이러한 쟁점들을 토론에 부치는 것은 메갈리아에 대한 찬반 커밍아웃을 겁박하는 일부 남성들의 인식을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 인식의 생성과 실천 자체가 탐구와 정치적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일베를 악마 집단화해서 특수하고 생경한 현상으로 치부해버리고, 오유를 대척점의 상상의 공동체 삼아 메갈리아를 ‘일베몰이’ 하는데 녹아 있는 그 욕망, 패러디를 통한 풍자의 ‘진정성’을 외면하기 위해서만 ‘진정한 페미니즘’을 찾는 그 이중성, 발화의 형식 논리만을 따져 ‘극단주의’의 대결로 인식하는 공론장의 이 허약함, 이 모든 것들은 메갈리아의 탄생 배경이면서 반메갈주의가 품고 있는 음험한 진실이다.

    100인위와 달리 메갈리아가 행동과 발화의 맥락을 운동사회나 진보진영으로 한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중식이 밴드와 넥슨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젠더 의제는 진보의 바로미터와 정체성을 둘러싼 이슈로 생성된다. 다시 말해 이번 정의당의 문예위 논평 철회를 주도한 분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일 수 있지만, 앞으로도 진보정당으로 몰려와 패를 까라는 요구들은 계속될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 평등한 사회라는 기치를 비어 있는 기표로 만들지 않으려는 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메갈

    누구나 인정하듯, 넥슨 사태는 ‘여자들에게는 왕자가 필요 없다’라는 너무나 ‘건전한’ 문구가 박힌 티셔츠 한 장 때문에 발생한 것도 아니며, 그것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젠더 의제는 노동의 권리, 정치적 시민권, 표현의 자유 등 사회의 모든 쟁점들과 얽혀 있는 관계로 존재한다.

    정의당 문예위 논평은 젠더 의제의 이러한 귀환점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 했던 것이지, 노동권 옹호에 한정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철회될 사안은 아니었다. 논평 철회의 또 다른 명분이었던 젠더 의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의 출발점은 ‘친메갈’과 ‘반메갈’이라는 대당을 넘어서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반메갈주의’로 하려는 정치는 무엇인가? 혹은 ‘반메갈주의’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젠더 의제를 통한 진보의 번영은 수많은 메갈리안들의 목소리와 절규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돌아볼 시간이다.

    ‘여성혐오’를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나

    메갈리아도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란도 ‘여성혐오’로부터 촉발되었다. 이론적 개념으로서의 여성혐오(mysogyny)는 단순히 폭력, 차별, 불평등의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과 세상의 주체를 남성(성)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양산된 젠더 체계의 무의식적, 의식적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브 세즈윅(E. Sedgwick)과 우에노 치즈코는 근대의 형성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근대는 강제적 이성애에 기반한 남성의 동성사회적(homosocial) 욕망을 기축으로 형성되었는데, 여성(성)을 남성들 간의 유대와 관계의 도구로 배치하고 배열하는 내용과 형식, 이것이 바로 여성혐오라는 것이다. ‘여성혐오에 반대한다’는 말은 ‘근대적 가부장제에 반대한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를 갖게 되는 셈이다.

    여성혐오와 따옴표 ‘여성혐오’를 분리하는 것은 여성혐오를 파악하고 역사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여성혐오’를 2000년대 이후 남성 자신들을 피해자로 두고 여성을 역차별의 가해자로 호명하여, 여성들에게 실체적 위협과 공포를 행사하는 공세로 파악한다. 이러한 ‘여성혐오’의 본질은 강남역 사건을 통해 보다 뚜렷해졌다.

    ‘밤길을 되찾자’는 동서를 막론하고 여전히, 강력하게 제창하는 여성들의 정치적 요구다. 조현병 환자의 우발적 사고로 한정해야할 것이 아니라, 즉 한 여성의 참혹한 죽음이 우연과 운명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의 구조적 결과로 보자는 것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의 주장이었다. 묻지마 살인이 특정 성별을 향하는 그 경향성에 녹아 있는 무의식적 구조로서의 여성혐오를 이해하고, 모든 여성이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불안을 책임 있게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집단적 성찰을 요구한 것이다.

    강남

    강남역 10번출구에 부착된 포스트잇들

    ‘여혐 남혐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요’라는 피켓을 들고 나와 시위한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과 진단을 본인들에게 불리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메갈리아의 행동주의를 ‘남혐’으로 규정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15년 간 한국 사회는 이기적이고 원자적인 개인을 이상화하면서, 공존의 가치와 상상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해왔다. 당장의 가시적이고 형식적인 불평등이 아니라면, 알아서 감수하는 것이 개인의 역량이라고 판단하는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성적 차이와 그 경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금기시 되었다.

    차이의 인정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부단히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만이 남녀 모두 공존의 풍요를 누리는 길이라고 가장 열렬히 주장해온 페미니즘의 정치사상적 시민권이 축소되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은 불평등이 사라졌다고 말해지는 이 시대에, 차별과 폭력이 더 교묘해진 것만이 아니라, 더 노골적이 되었다고 정확하게 통찰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기꺼이 달려온 남성들은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지 말라고 하면서, 메갈리아를 ‘남혐’으로 규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으로 편을 가르고 여성들에게만 유리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망상을 키워가면서 ‘여성혐오’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이와 같은 망상을 키우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국가 정책과 정치다. 한편에서는 젠더 관련 법제도의 불완전성과 사회문화적 안전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젠더 의제에 대한 구조적 접근의 부재에 원인이 있다.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시선 강간’을 법적 용어로 옮기자면 ‘시각적 성희롱’이 된다. 강간, 추행, 성희롱으로 성폭력을 규율하는 현행 법제도에서 직장 외부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은 규율의 대상이 아니다. 직장 내 성희롱조차 문제제기 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선의 폭력은 안정망이 부재한 현실을 드러낸다.

    보다 참담한 현실은 이런 안전망의 부재를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으로 해결하려는 대신, 여성을 ‘시혜’와 ‘보호’의 대상으로 두는 몇 가지 잔여적 정책으로 땜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우선주차석, 여성배려칸, 여성안심귀가 등은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여성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린다는 ‘여성혐오’의 자원을 공급하는 데에만 귀결되고 있다. 성별 분업, 성별 임금격차,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여전히 추상적 수치로만 떠돌면서 그 현실의 구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정치적 도전이 외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를 반대한다면, 그리고 그 행동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여혐, 남혐 하지말아요’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도전을 조직하고 기꺼이 동참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필자소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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