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쏘련은 폐쇄된 사회 아니었다
    노동력 판매 아닌 사회적 참여“
    [쏘련-미래를 향한 추억③ ] 인구 이동과 정보 유통
        2012년 08월 04일 11: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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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국가와 인구 이동 통제

    모든 근대국가는 인구 이동을 통제한다. 근대국가뿐만 아니라, 관료체제가 비교적 잘 완비된 동아시아의 전근대 국가들도 어느 정도 인구 이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예컨대 조선왕조를 보자.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중죄였으며, 외국인들이 조선 내부로 들어오는 것은 ‘귀화’라는 매우 엄격한 국가적 절차를 밟아야 가능했다. 물론 제주도 사람 등이 표류를 위장하여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는 ‘탈출’에 해당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현상이었다.

    전근대 국가도 이 정도의 인구 이동 통제가 가능했다면, 근대 국가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대체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는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것에 대한 통제에 중점을 두며,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외부자들의 틈입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불법 체류 외국인’은 10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현지인과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언제나 무조건적인 감금과 신체 구속, 추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특히 개발 독재라는 형태의 발전(도상) 국가의 관심은 ‘내부자들의 외부 유출’ 방지에 쏠려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렇게 해야 정치적 반대자들의 단속과 정보 유통의 관리가 쉬워지고, 외환의 국고 축적이 빨라지고, 고급 노동력 해외 유출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1989년 해외여행 완전자율화가 시행되기 이전의 한국에서 복수여권의 보유는 특권층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이제 해외여행이 자율화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징병 대상자들의 해외여행은 사실상 병무청의 밀착 관리를 계속 받는다.

    서방언론의 이중 잣대

    초강력 국가의 각종 개입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이를 문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이나 유럽의 언론들도 한국의 징병 대상자들과 병무청의 매우 불편한 관계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왜 미국이나 유럽 언론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냐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관리 대상자인 한국의 ‘장정’들이 끌려갈 군대는 유사시에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의 세계 패권을 사수하기 위해 중국군, 북조선군을 적군으로 삼아 대량살인을 벌일 ‘한국 측의 총알받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서방언론들은 쏘련이 1987~88년 이전에 시행했던 해외여행과 이민에 일정한 수준의 제한을 둔 정책에 대해서는 수십 년 동안 수십만 개의 기사를 쏟아내며 이를 비판했다.

    이들 언론들이 보도한 내용의 절대 다수는 “쏘련 정권의 탄압적인 이민, 해외여행 정책”, “쏘련의 폐쇄성” 등 쏘련의 정책을 극렬하게 규탄하는 것들이었다. 이 같은 주장의 근저에 깔린 논리는 자명하다. ‘우리가 하면 로맨스, 적들이 하면 불륜’, 이 논리일 뿐이다.

    쏘련 가정의 일상적이고 평온한 저녁 모습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인구 이동 제한 정책들을 수립하고 집행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발전(도상) 국가들이 그 같은 정책을 도입한 이유와 부분적으로 유사하다.

    예컨대 냉전이라는 상황에서 비교적 힘이 우세한 ‘적진’, 즉 자본주의적 국가들과의 자유왕래를 허한다는 것은 체제 유지 차원에서 보면 자살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자유왕래와 체제 유지

    2003년의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기억하는가? 그 때에 미군 당국이 사전에 알아낸 이라크군 주요 ‘장수’들의 전자우편 주소 등을 통해 분열 공작을 꾸민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군은 그들 중의 상당수와 사전에 연락해 ‘적당한 금액’과 미국 영주권 부여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그들의 저항 포기, 즉 배신 언질을 미리 확인 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공작이 대외적으로 비교적 개방됐던 이라크에서는 가능할 일이었지만, 과연 북조선에서 가능하겠는가?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가 대외적 저항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제한적 대외 개방을 바라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인구 이동 통제 정책의 배경에는 이와 다른 이유도 있다. 예컨대 현실 사회주의 국가 주민들의 ‘해외 돈벌이’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거역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흥 소부르주아’ 계층 형성을 가능케 해 체제에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인구 이동에 나름대로 제한을 둔 이유였다.

    이들은 해외에서 치부에 성공해 비교적 평등한 노동자 사회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고, 사회주의 모국에서도 자본주의적 시장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할 확률이 높다. 이 같은 나의 생각은 과연 기우(杞憂)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일찌감치 내부 주민들의 대외 이동을 거의 완전하게 개방했으며, 그 결과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이미 튼튼한 소부르주아 계층이 형성됐다. 중소 규모 재산가와 기존의 관료, 일부 지식인들로 구성된 ‘민족주의적 연합’이 그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으며, 급기야 전후 유럽에서 전대미문의 종족적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부자 되세요.”가 보편적인 인사말이 돼버린 남한 사회에서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불평등의 누적이 종족 사이의 불화 등 매우 큰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허가주의 정책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인구 이동 제한 정책 수립의 배경은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수출 주도가 아닌, 내포적인 경제 위주의 사회주의 사회에서 주민들이 나라 밖으로 이동하게 되면 만성적인 경화(硬貨) 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해외로 파견된 학자 등이 거기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그들에게 적당한 액수의 달러나 엔화 등을 바꾸어 주어야 하는데, 매우 제한된 외환 보유고를 가장 급한 물품(약부터 과학 잡지까지) 구하기에 계획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이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국가에 출장 보내는 것을 자제하는 풍토가 생기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자본주의 국가들과 거의 영구적인 대립 상태에 있어온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된 국제적 인구 이동 통제 정책은 바로 허가주의였다. 해외 방문이나 이민은 원칙상 가능했지만 각 경우마다 관련 당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해외 방문 내지 이민 허가를 둘러싼 정책들은 국내외 상황에 따라 온건할 수도, 강경할 수도 있었다. 1920년대 쏘련에서 해외 방문 내지 이민/망명 허가를 신청하는 이들은 대부분 허가를 받고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출국할 수 있었다.

    예컨대 볼셰비키들과 대립해온 온건 사회주의자인 멘셰비키의 지도자들인 율리 마르토브(1873~1923)는 1920년 9월에 출국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독일로 출국했다. 그는 볼셰비키들의 많은 정책(특히 사형제 부활과 적색 테러 등)을 비판했지만 사회주의 혁명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소비에트 당국이 소비에트 공민으로서의 그의 출국 자유를 제한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수천 명의 반혁명적 지식인과 정치인 내지 볼셰비키 지도부와 대립한 혁명가들은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로 ‘출국 명령’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또 한 명의 멘셰비키의 지도자이면서도 마르토브보다 훨씬 더 반볼셰비키적인 표도르 단(1871~1947)은 1922년에 소비에트 정권의 적으로서 출국 명령을 받았다. 이 같은 경우 출국자는 쏘련 국적을 박탈당해야 했으며, 특별한 허가 없이 재입국 할 경우 사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20년대는 쏘련의 이민 역사에서 비교적으로 자유로운 해외 이동의 시기로 기록된다. 단, 정치적 내지 개인적 이유, 또한 출장 같은 직업적 필요성에 의한 출국이 가능했다 해도, 예컨대 해외 취업을 목표로 한 노동 이민은 원칙상 불허됐다. 소비에트 정권이 자국 공민이 해외에서 자본가들의 착취 대상이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 이민이 불허된 이유

    흥미로운 사실은 나중에 쏘련뿐만 아니라 좌파 전체의 적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1920년대 쏘련의 비교적 온건한 이민 정책의 덕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아인 랜드(1905~1982)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1925년에 미국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 비자를 받아 쏘련에서 합법적으로 출국했다가 미국에서 눌러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미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정착한 뒤인 1930년대에 자신의 부모를 초청하려 했을 때에는 쏘련 당국이 출국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세계공황으로 인한 국제 정치적 긴장, 그리고 스딸린의 1인 권력 구도의 공고화 등 국내외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이민, 출국 등과 관련된 쏘련의 인구 이동 정책은 1930년대 초반부터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1920년대처럼 비교적 온건했던 허가주의 출국 정책이 다시 재개된 시기는 데탕트가 시작된 1970년대였다. 1970년대 동안 출국 허가를 받아 쏘련에서 외국으로 영구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의 숫자는 약 25만 명에 가까웠다. ‘국가 기밀 누설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출국 비자를 거부당한 당한 사람들이 약 2~3천 명 됐지만, 출국 신청자의 절대 다수는 실제로 출국할 수 있었다.

    물론 신청에서 허가가 나오기까지 과정은 길고 지루했다. 외국에서 사는 친척 등이 보내온 초청장을 제출하고, 단위 직장과 부모 등이 출국에 대한 이의가 없다는 동의서를 당국에 내고, 그 이후에도 약 반 년 동안 출국 허가 심사를 기다리고…

    쏘련 당국은 1972년에 지나치게 많은 고급 전문가들이 이민을 간다는 사실에 놀라 무상 고등 교육을 받고 영구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들에게 그 교육의 값을 먼저 내고 나가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쏘련의 이 같은 방침에 대해 서방의 여론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서자, 그 요구를 이내 포기하기도 했다.

    이민 허가가 나오는 과정이 길고 지루했지만, 유대인 등 꼭 출국해야 하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있었던 소수자들의 절대 다수는, 어느 정도의 인내력만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영구 이민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친척들, 미국과 이스라엘로 이민

    나의 아버지 쪽 친척들의 절대 다수는 1970년대에 미국과 이스라엘로 이민을 가버렸다. 그들 중 누구도 출국 비자 발급이 거부된 적이 없었다. 쏘련에 남은 나의 아버지는 친척이 이민을 갔다는 이유로 그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또 우리 가족은 미국이나 이스라엘에서 살게 된 친척들과의 편지, 전화 교신도 자유로웠다.

    1980년대의 신냉전 기류 속에서 이민 관련 정책은 다시 한 번 강경하게 돌아섰다가 1986년부터는 온건하게 전환됐으며, 1988~89년부터는 사실상 자유 출국 정책으로 전환됐다. 공교롭게도 남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쏘련의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된 셈이다.

    쏘련 가정주부들의 모습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1970년대 초반 이후 줄곧 “같이 이민 가자.”, “미국이나 이스라엘에 나가서 살자.”는 강력한 권유를 받고도 이를 끝내 뿌리치고 비교적 평등하고 안정적 쏘련의 삶을 택한 유대인 등 소수자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외국에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다진 친척이 있을 경우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이민을 택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불가능했던 것은 쏘련 공민의 자유로운 해외 취직, 즉 노동을 주된 이유로 한 이민이었다. 쏘련이 1970년대에 국제 인권 협약 차원에서는 가족 재결합이나 유대인 등 소수자들이 그들의 민족 국가로의 이민을 가는 것을 막지 않았고, 인도주의적 이유의 출국도 금지하지 않았지만, 외국 자본을 위한 노동력 공급 의무를 느끼지 않았으며 그럴 의사도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대해 본질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해외 자본에 쏘련 인민들의 혈세로 운영되는 대학이나 직업학교에서 무상 교육을 받은 인재들을 ‘공급’해주는 것을 허용하기 힘들었다. 이념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노동력이 상품이 되어 인력시장에 팔려나간다는 데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력 판매가 아닌 사회적 참여

    쏘련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이란 이념적으로 ‘사회적 참여’로 개념화됐으며, 또 제도적으로 임금이 시장적 수급원칙보다 정치적 고려(예컨대 원래부터 혁명의 주력부대이었던 숙련공의 임금은 비교적으로 높았으며 뚜렷한 상승경향이 있었다) 등에 의해서 결정됐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원칙이 통할 리는 만무했다.

    후자의 법칙대로 자본가에게 “몸을 판다”는 것은 사회주의적 원칙의 포기를 의미했다. 일면 교조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러시아를 포함한 준주변부, 주변부 국가들의 인력이 핵심부나 한국과 같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준핵심부 국가에 마구 흡인되어 싼 값에 일회용품처럼 이용됐다가 버려지는, 각종의 인권 침해로 점철되는 오늘날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해외 취직의 제한은 노동자 ‘보호’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회에 기여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쏘련 기술자들의 자긍심을, 온갖 멸시를 당하면서 삼성과 같은 악질 자본의 1년, 2년짜리 머슴으로 고생하는 러시아 기술자에게 약간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전자에게는 비시장적인, 개인적인 노동 동기가 있을 수 있었으며, 일 그 자체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이 자주 발견됐지만, 후자는 그저 이를 악물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차별대우를 참아가면서 자신의 힘과 시간과 에너지를 파는 것일 뿐이다. 국경이 열려 삼성과 같은 세계적 야수들이 가난한 나라들에서 ‘인재 사냥’(talent poaching)의 기회를 얻은 것은 정말 역사의 바람직한 발전인가?

    정보의 유통

    ‘개방성’이란 사람들의 왕래뿐만 아니라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도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차원에서도 쏘련은 기본적으로는 허가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기술, 자연과학 서적은 물론, 웬만한 해외 소설이나 인문, 사회 계통의 서적들도 물론 주요 도서관들에 의해서 구입됐으며, 그 중의 일부는 번역돼 내부 서적 시장에서도 유통됐다.

    하지만 예컨대 쏘련 체제에 위험하다고 판정된 책들이 도서관들에서 ‘특수 보존과’에 맡겨져 ‘특수 서적 독서 허가’를 받은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했으며, 외국 공산당들의 정기 간행물 이외의 외국 정기 간행물들은 규모가 큰 일부 도서관에서 소장돼 열람은 가능했지만, 보통 가판대에서 팔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도서관 열람실에 잘 드나들지 않는 일반 노동자는 설령 영어를 잘 읽어도 (실제로는 그러한 노동자들이 미미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뉴욕타임즈>를 본인 집 근처의 가판대에서 구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특수 서적 독서 허가가 없는 일반 노동자나 사무원은, 예컨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등 쏘련 체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서적들을 찾아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에서 당시 이미 ‘체제의 적’이 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초기 작품들이 실린 1960년대 초반의 쏘련 잡지 열람을 신청했다가 “그 책에는 위험한 작품이 실렸다.”는 이유로 열람을 거부당한 불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다른 일면으로는 예컨대 정권의 허가를 받지 않은 쏘련 작가의 자율적인 해외 작품 출판은 1960년대까지 가끔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됐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사살상 허용됐다. 학자들의 해외 학술지 논문 게재는, 게재 논문의 러시아어 번역본 제출의 조건으로 일반적으로 허용됐다. 러시아어 번역본 제출 요구는 국가 기밀 누설 위험 때문이라는 이유로 설명되곤 했다.

    정보통제, 쏘련과 남한

    위와 같은 정보 통제의 풍경은, 1980년대를 이념 서클에 소속돼서 활동을 해본 남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나 고려대 도서관에서 소장돼 있었던 『자본론』의 원본이나 일역본을 운동권 학생이 못 빌려도 허가를 받은 교수들은 빌려 볼 수 있었다. 북조선에 대한 자료 접근은 『자본론』보다 훨씬 더 제한됐다.

    1980년대는 그렇다 치자. 지금도 국립중앙도서관의 북한자료실이 아닌 길거리 가판대에서는 <로동신문>은 아쉽게도 보이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원칙에 전면 위반되는 이와 같은 군사 독재 식의 정보통제 정책들은 쏘련의 단점이었으며, 마르크스나 레닌이 꿈꾸었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래의 사회주의는 생산자들에 의한 생산 시설의 자율적인 운영은 물론 생산자들 모두가 모든 정보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전의 유산과 냉전의 현실이 집권 관료들에게 강요한 이와 같은 정보 접근 제한 정책은 부당한 것이지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비가 위축된 만큼 독서와 음악이 인민적인 취미였고 특히 지식 청년들이 왕성한 지적인 궁금증을 보여주곤 했던 쏘련 사회에서는, 금지당한 아렌트의 책이나 금지당하지 않았더라도 일부의 도서관에서만 드물게 소장되고 당 관료들에 의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했던 에릭 프롬의 책을 보려고 했던 사람들은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번역, 출판되지 못한 외국 서적들은 흔히 자기 스스로 출판한다는 뜻인 ‘사미즈다트’라는 이름의 ‘지하 출판’ 방식으로 번역되고, 유통됐다.

    이런 방식으로 쏘련 정권이 ‘수정주의자’, ‘소부르주아적 철학자’라며 비판하고 멀리했던 아도르노나 마르쿠제 같은 서구 철학자들의 주요 저서들이 간행됐다. 아마 이런 서적을 읽은 후기 쏘련 지식인들의 비율은 남한보다 높았을 것이다.

    ‘허가주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만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읽을 뿐 대다수가 처세서나 자기계발 서적 등에 빠지거나 영어 시험 준비나 해야 하는 사회는 그야말로 병리적인 사회가 아닐까? ‘반항적인’ 독서에 대한 욕구는 쏘련 관료주의 사회보다 남한 같은 무제한적 소비주의 사회에서 훨씬 심각하게 꺾일 것이다.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사회

    쏘련은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사회였다. 내전을 거쳐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숙명적인 대립 체제 속으로 들어간 뒤로는 국제 왕래를 다소 통제적인 ‘허가주의’ 원칙에 따라 조절한 측면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주의적 성격의 1917년 10월 혁명의 계승자였던 만큼 늘 해외의 계급, 해방 투쟁 보도로 자국 신문들의 국제면을 채우기도 했다.

    그러니까 쏘련 공민들이 비록 길거리에서 <뉴욕타임즈>를 사보기는 어려웠겠지만, 공식적 매체만을 읽는 ‘평균적’ 쏘련 공민들은 쿠바에서의 생활이나 니카라과 혁명에 대해서는 <뉴욕타임즈> 독자들보다 꽤 잘 알았을 것이다.

    쏘련은 197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 이념 속에도 내재돼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국경을 넘는 가족 재결합의 권리나 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로 이동하고 정착할 권리 등을 십분 인정했지만, 동시에 국제 노동력 이동을 억제함으로써 결론적으로 자국민을 국경 너머의 착취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혁명의 보수화와 왜곡의 결과로 경직돼버린 집권 관료들의 해외 정보 통제는 1980년대의 남한과 비교될 수도 있겠지만, 그 효과는 상당 부분 지하 출판에 의해서 상대화됐다. 지하 출판으로 잘 알려진 서구의 자유주의적 전체주의 비판이나 종교철학 등이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쏘련 지식계 안에서 범람하여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로 유명세를 탄 것을 보면, 관료주의적인 정보 통제는 무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역효과를 내기도 한 모양이었다. 민주성과 개방성을 잃는 순간 사회주의는 그 진수를 잃어 자기 소멸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냉전이 부추기는 정보 통제의 비극이 있었다 해도, 쏘련은 비자본주의적 의미에서는 여러 모로 매우 개방적인 사회였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 허가를 받아 출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일부러 아프리카, 아시아 학생들을 위해 신설된 모스크바의 ‘바트리스 루뭄바 이름의 민족 간 친선 대학’을 위시한 수백 개의 대학에서 주로 세계 주변부에서 몰려온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나는 북조선, 앙골라, 쿠바에서 온 학생들과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낸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나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쏘련 출신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자기 지식과 솜씨를 미국이나 유럽에서 ‘잘 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은 쏘련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쿠바나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적 국가에 대한 공부, 그곳들의 주민들과의 펜팔, 불가리아 같은 나라로의 휴양 여행 등은 적극 장려되곤 했다.

    관용과 개방성

    쏘련인들이 미국에 가서 몸과 마음을 팔 권리를 – 쏘련 공민으로 남아 있는 한 – 갖고 있지 않았지만, 쏘련 매체들이 ‘미제 지배자’와 “인플레이션, 실업, 저질 소비문화, 미래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일반 미국인”을 철저히 구분해 전자에 대한 비판과 후자에 대한 동정을 촉구하곤 했다.

    그러기에 쏘련에서는 미국에 대해서든 그 어떤 다른 특정 외국에 대해서든 맹목적으로 혐오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북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공포와 증오심을 주류 언론들이 열심히 가르치는 남한에 비한다면, 쏘련 사회는 오히려 관용과 개방성의 표본쯤으로 보인다.

    국제주의 정신이나 자본주의 시장적 고용 관계의 부정 등 쏘련의 장점을 살리되 정보 통제 같은 단점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맞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굳이 ‘폐쇄성’을 이야기하자면, 평양에 사는 친척들과의 가족 재결합은 말할 나위도 없고, 평양으로 전화를 걸거나 편지 쓰는 것도 불가능한 남한 현실이 특정 국가에 대한 폐쇄성의 모범을 보인다는 점부터 직시해야 할 것이다. 시장주의적 개방성이 그렇게 왕성한 남한에서, 인도주의적 의미의 개방성이 과연 조금이라도 존재하고 있는가?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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