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린 연금 받으러
    일본 가려 했던 어느 퇴역군인 이야기
    [과거와 현재] 어떤 평범한 충성심과 '통치'
        2016년 07월 26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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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5월의 일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참여한 관련자 10여명이 국방부를 상대로 밀린 군인연금을 지급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정호용, 황영시,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신윤희 등 이른바 ‘5공 인사’들이다.

    이들은 1997년 4월 12·12 군사반란 모의, 참여 죄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내란죄 등을 범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에는 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군인연금법 조항에 따라 그때부터 연금 지급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법률심판제청과 국방부의 연금지급 거부에 대한 취소소송을 함께 냈다는 것이다.

    이런 소송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2004년 이들은 몇명씩 짝을 지어 공무원연금관리공단, 국방부 등을 상대로 비슷한 취지의 소송을 제기한 바 있었으며 모두 패소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 다시 한 번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2014년의 소송도 결말은 허무했다. 기사를 접한 사람들이 이들의 뻔뻔함에 충분히 분개할 새도 없이 다음달 법원이 이들의 청구를 바로 각하했기 때문이다. (2014년 5, 6월의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면 이 과정을 접할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이들은 또 소송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관련자 중 한 명인 전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각하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 사망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소송을 제기한 것일까?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돈’ 때문이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5, 6공을 거쳐 출세 가도를 달린 이들은 모두 고위 장성급으로 전역했고, 17년간 ‘밀린’ 연금 액수는 각기 몇 억은 된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베팅’해볼만한 게 아닐지.

    이 사건을 보며 1950년대 후반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일본 정부에 보상금 청구”를 위해 “외무부에 여권을 신청”한 “80대 노옹”의 이야기이다.

    일본군에 50 평생을 바친 80 노인이 일본정부에 년금(은급)을 청구하여 보상금을 받기 위하여 일본으로 여행하고자 27일 외무부에 신청하여왔다. 화제의 주인공은 당년 80세의 박두영(朴斗榮)씨(주소=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로서 박씨는 구한국시대 19세에 일본에 유학 가서 21세에 일본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해방될 때까지 46년간을 일본 육군에 복무하였는데 일본 육군대좌로서 해방된 후 오늘에 이르러 일본정부의 년금을 탈 권리를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일본 정부에 청구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박씨는 외아들을 3년 전에 사별하여 지금 손자들과 생활하고 있는데 (중략) 이제 연금을 청구하면 일본 정부가 다른 일본인과 같이 지급할지 의문이라고 한다. 한편 외무부 당국자는 여행 허가에 앞서 주일대표부를 통하여 박씨의 연금 지급 가부에 관하여 일본 정부에 문의할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59.11.28)

    동아일보

    식민지 시기 일본군 대좌로 전역한 박두영이라는 사람이 8.15 이후 지급받지 못한 ‘은급(恩給; 연금)’을 일본 정부에 청구하러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다는 내용이다. “외아들을 3년 전에 사별”했다는 데에서 생활의 어려움이 느껴지며, 왜 뒤늦게 밀린 연금을 받을 생각을 했는지 짐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기사는 아마 박두영의 말을 받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은데, 현재 조사된 그의 대강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880년생인 박두영은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도일하여 1903년 일본 육사를 15기로 졸업했다. 일본군 근위사단 견습사관을 거쳐 1904년 이래 대한제국 육군 포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병합 후에는 조선보병대(1907년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킬 때 일부 남겨둔 인원을 모태로 조직한 식민지시기 구왕실 근위부대), 조선 주둔 일본군 헌병대 장교로 복무했다. 1931년 조선보병대가 해산할 때 일본군 포병 대좌로 예편했다.

    직접 기록을 보지는 않았지만, 박두영은 최소한으로만 따져 보아도 일본군으로 21년간 복무한 셈이고, 예편 후에는 은급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액수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45년 종전 때까지 일본은 기본적으로 ‘군인 우대 사회’였다. 따라서 전역한 장교의 은급액은 상당했다. 일례로 일본 육사 26기로 9년간 복무하고(1914~23년) 대위로 예편한 김준원은 그 후 은급 만으로도 일가의 최소한 생계 유지는 가능했다고 한다(김정렬 회고록『항공의 경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태평양전쟁기 일본군 항공장교로 복무하고 8.15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은 김준원의 장남이다.).

    이미 14년간 은급을 받았던 박두영은 1945년 이후 은급을 받지 못한 14년이 억울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어쩔 수 없어서 잊고 지냈던 은급이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서 누가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무엇이 팔순의 노인으로 하여금 밀린 연금을 청구하러 일본에 가기로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박두영은 1931년 예편 후에도 일본군 고급 장교 출신으로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만주의 친일 조선인 단체 민생단의 단장도 했으며, 그 밖에도 각종 ‘친일단체’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박두영의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력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박두영은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이었고, 또 대한제국 군대 장교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에 대단한 충성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그는 20년 이상 일본군 장교였지만 일본 제국에 특별한 충성심을 가졌던 것일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에게 일본군 복무는 단지 직업이었을 뿐, 먹고 살기 위한 길이었을 뿐이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모든 ‘통치’는 근본적으로 유별난 충성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무한 만큼 법이 정한 대로 연금을 받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런 ‘평범함’이 모여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는 ‘식민’이라는 한정어를 붙여도 마찬가지이다. 박두영의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어떤 ‘교훈’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바꾸어 말하면 그를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박두영은 2005.5.31~2009.11.30 활동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로 호명하는 것만으로 오늘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크게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변죽만 울릴 수밖에 없는데, 다른 기회를 빌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추기: 후속 기사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박두영은 일본에 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세간에 화제가 된 지 석달여가 지난 1960년 2월 10일 끝내 밀린 은급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필자소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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