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출신 에스트라다,
    서민적 이미지의 환상들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좌파 통합
        2016년 07월 25일 1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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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에스트라다의 쇠락과 필리핀 좌파

    1998년 6월, 영화배우 출신의 조셉 에스트라다는 압도적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1986년 코리 아키노 정권 성립 당시만큼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아키노 정권은 선거가 아니라「엣사(EDSA)」로 알려진 피플파워 혁명의 산물이었다.

    이 대비는 대중들이 투표장에서 선택한 정권에 대한 기대의 저하로 귀착된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키노 정권은 6년간의 재임 기간 중 사람들의 빈곤을 경감시키지 못했고, 정권 초기에 사람들이 품었던 열광적 지지는 식어버리고 말았다. 뒤를 이은 라모스 정권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스트라다의 선거조직 구성에 협력한 좌파, 예를 들면 민족민주전선(NDF)의 전 리더였던 오라시오 모랄레스나 에드 데 라 토레 등은 에스트라다가 다른 대통령 후보에 비해 “덜 나쁜 악”이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말했다. 에스트라다의 영화 속 이미지, 그리고 실제 그의 성품 역시 가난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스타일이어서,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에스트라다

    조셉 에스트라다 전 필리핀 대통령

    에스트라다의 지지자들은 영화에서의 이미지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에랍(에스트라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운동을 했다. 1950년대에 대통령이 된 라몬 막사이사이는 “민중들의 컨설턴트”라는 이미지로 전설이 되었는데, 에스트라다를 막사이사이와 동렬에 놓고 포퓰리스트로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의 가장 확실한 스타일은 민중들의 컨설턴트가 아니라 자신의 패거리들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우파 포퓰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조차 그에게는 과찬이 될 것이다.

    실제로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발생한 사건에 의해 이 포퓰리스트 이미지의 진위가 의심받게 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몇 달이 지난 후, 그가 선거운동에서 약속한 일자리를 요구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말라카냥궁으로 모여들었다. 대통령 관저에는 정부의 다양한 기관에 직업을 알선하는 알선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 군중들은 수십 명이었으나, 곧 수백여 명이 되고 급기야 수천 명으로 불어나 대통령 관저로 밀려들었다. 어느 날 아침, 제한된 수십 명을 입장시키기 위해 문을 열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대혼란이 벌어졌고, 이를 막기 위해 대통령궁의 경비는 경찰봉과 최루탄을 써야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서너 명이 사망했고 에스트라다는 직업알선소를 폐쇄했다. “난동”의 재발 방지를 위해 알선소의 기능은 지방과 지역의 정부기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소란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에스트라다는 선거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싼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공약을 지킬 의사가 없었다. 결국 몇 년간이나 비어 있는 공공주택(왜냐면 정부가 집세를 부담할 수 있는 빈곤가족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빈민들이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불법점거로 고발당했고, 경찰기동대에 의해 강제로 퇴거당했다. 기동대는 무차별적으로 최루가스를 퍼부었다.

    에스트라다 정권 수립 후 1년도 되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 그리고 이 정권 역시 다른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경제 불황

    IMF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경제 침체는 1999년 내내 계속되었다. 공업생산은 1.4% 하락하고, 페소화의 가치는 31% 하락했다. 실질실업율은 노동인구의 약 50%에 달했다. 1999년 9월까지 약 300만 명이 정리해고와 공장폐쇄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

    도시나 지방이나 할 것 없이 대량실업에 휘말렸다. 마닐라수도권의 대규모 공장폐쇄는 의약품, 섬유 · 의류, 자동차 조립공장 등으로 파급됐다. 싼 수입농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됨에 따라 농산물은 팔리지 않고 창고에서 썩어갔다. 지방에서의 도산이나 실업은 대도시로의 폭발적인 인구 유입과 증대를 초래했다. 경제에 대한 절망감이 도시를 뒤덮어 거지 생활이나 가두 행상으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필리핀 경제 전체는 단 한 줄의 가느다란 “끈”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그 끈은 연간 약 80억 달러를 송금하는 해외의 필리핀노동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에스트라다 정권의 업적은 정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미국과의 주류미군협정(VFA)을 성립시킨 것뿐이었다. 이 협정에 의해 미국은 연료의 보급이나 휴양·레크레이션 등을 위해, 또 군사훈련을 위해 옛 미군기지 시설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에스트라다는 상원에서 이 주류미군협정이 성립되면 “관광”(사실상의 매춘)산업의 활성화로 고용이 창출되고 자금이 필리핀 경제에 흘러들어올 거라고 선전했다. 협정은 상원에서 가결되었으나 약속한 관광업의 호경기조차도 실현되지 않았다.

    좌파의 대응

    1999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벌어진 마닐라수도권에서의 집회·시위는 좌파 세력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그들의 지지기반과 세력은 유지되고 있었다. 좌파는 이 기간 중, 거의 중단되는 일 없이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을 모을 수 있었고, 막다른 골목에 빠진 정치 상황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것은 1980년대에 활발히 행해졌던 “거리 국회”의 재현이었다.

    최대 규모의 집회는 1999년 8월 20일 마카티에서 벌어진 것으로 약 8만 명이 참가했다.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이 집회는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의 다양성은 색깔로 구분되었다. 참가자의 3분의 1은 코리 아키노의 “옐로우 그룹”, 즉 1980년대에 아키노가 주도한 집회에 참가했던 상류의 프티부르주아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3분의 1은 교회 단체에 속하는 “화이트 그룹”이고, 나머지는 다양한 좌파 단체에 속하는 “레드 그룹”이었다. 입고 있는 복장에도 그 색깔들이 나타나 참가자들의 소속은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8월 20일의 집회는 아키노를 비롯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하이메 신 추기경으로 대표되는 교회 그룹이 거리 국회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옐로우 그룹과 화이트 그룹을 이끌면서 집회를 부르주아 개량주의 노선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자유주의 리더가 에스트라다의 “차차(cha-cha)계획”(「charter change」라는 에스트라다의 개헌 계획)에 대해 규탄했지만, 그 비판의 표적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라 에스트라다가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려는 것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에 맞춰져 있었다.

    6개월간의 항의행동을 지속해 나간 것은 주로 좌파 그룹이었다. 이 지속적인 집회의 중요한 의미는 다양한 좌파 세력들이 힘을 모아 함께 시위를 전개하는 경향이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위기

    1999년 11월에서 12월 사이, 거의 모든 여론조사기관이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을 보도했다. 75% 정도의 지지율이 45%로 급락한 것이다. 필리핀의 상위 500대 기업은 에스트라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지배계급 내에서 에스트라다에 대한 환멸과 불만이 서서히 가시화되었다.

    재계는 에스트라다의 정실(패거리)주의에 문제의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 측근들의 재계 인사들에 대한 오만한 태도가 타깃이 되었다. 에스트라다가 대기업 텔레콤 회사 사장인 마누엘 팡길리낭을 한밤중에 불러내 회사 주식을 자신의 측근에게 팔지 않은 것에 대해 질타했다는 소문이 재계에 퍼졌다. 그 다음 날 주식은 곧바로 매각됐다.

    에스트라다의 측근 중에는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자금 등 불법 정치자금에 관련된 혐의에 의한 범죄인 인도 문제를 둘러싸고 쟁송중인 마크 히메네스와 같은 자들도 있었다. 신문은 그들이 수상한 거래에 관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히메네스는 라틴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에스트라다의 고문으로, 일설에는 “콜롬비안 사건” 이나 “메델린 마약 카르텔”〔콜롬비아에서 마약 밀매와 유괴 등을 행한 범죄조직〕과의 거래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또 한 명의 냄새나는 측근은 카지노 왕인 스탠리 호로 그 역시 클린턴 대통령에의 불법선거자금 제공자였고, 아시아 마피아의 보스로 알려졌다. 만약 이런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빈국을 돌아다니는 마약 자금의 돈세탁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반(反)에스트라다 구테타가 일어날 것 같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재계는 등을 돌렸다. 에스트라다는 마카티 지구와 케손시의 재계 인사들과 라모스 전 대통령이 이끄는 세력들이 정권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당시 쿠데타 계획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어느 그룹과 접촉한 적이 있다. 그들은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 즉각 대체할 수 있는 민간 정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민중들에 주어진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이 가해질 것이다. 너덜너덜한 걸레가 된 체제를 구하기 위해 혁명적 세력이나 진보적 세력을 분쇄하려고 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주의노동당은 성명을 발표했다.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에스트라다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정부를 만들기 위해 모든 힘과 능력을 동원하여 저항할 것이며 민중들을 결집시킬 거라고 선언했다.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에스트라다는 필리핀 경찰청장에 그의 가까운 지지자이자 인권침해자인 핑 락손을 군 서열을 무시하고 임명했다. 또 질서유지를 구실로 마닐라수도권에 해병대를 배치했다. 그러는 한편 아키노와 하이메 신 추기경 진영을 달래기 위해 「차차 계획」(개헌 계획)의 철회를 선언하는 한편, 아키노 지지자인 알프레도 림을 내무 장관에 임명했다.

    좌파 통합

    좌파의 통합은 필리핀 혁명적 좌익세력에 있어 중요한 과제이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 있어서도 좌파의 정치적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어떤 그룹들은 사회주의자의 전위들이 다양한 단체 속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상황에 대해 강력한 사회주의적 개입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재결집이 필요했다. 사회주의적 개입은 분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특정한 단체가 이익을 보게 해서는 안 되며, 또 어떠한 단체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적 개입은 대중 속에서 프로파간다의 수준을 제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단지 실행 가능한(자본주의국가가 허용하는 범위 내의) 요구나 경제주의적 요구만이 아니라, 국가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명확히 하는 요구 또한 사회주의적 개입에는 포함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국가와 그 체제에 도전하고 폭로하는 과도적 요구를 제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노동당은 “빈민의 빈민에 의한 빈민을 위한 정부”라고 하는 슬로건을 내걸어 왔다. 이 슬로건에서 충분한 계급의식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필리핀에 있어서의 빈민은 노동자계급뿐만이 아니라, 도시빈민, 빈농, 프티부르주아의 하층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종래의 민족민주주의 개념에 의하면 이른바 “민족민주혁명 연합정권” 안에 민족부르주아를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의 슬로건은 낡은 민족민주주의의 컨셉에 대해 간접적으로 반론할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좌파 진영의 통합에는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특히 정치적 토론의 싹을 송두리째 잘라버리는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인해 통합이 좌초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필리핀 자본주의의 특징(후진 자본주의, 반식민지, 반봉건)이나 스탈린주의의 죄상과 같은 문제는 적절한 문맥을 통해 다룰 문제인 것이다.

    좌파진영이 찬동할 수 있는 일련의 정치적 요구와 문제를 통해 통합의 가능성을 열어나갈 수 있다. 사회주의노동당(SPP)은 “에스트라다 체제에 대한 올바른 혁명적 태도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기본문제를 우선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개의 좌파 진영 내에서 우익적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책이나 헌법 개정(전면 거부인가 아니면 제헌의회의 소집인가), 부채 문제, 계급적 노동운동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하는 등의 관심사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해나가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했다.

    우리는 필리핀 공산당 CPP와도 전술적 통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필리핀 공산당 내부에는 두 가지의 경향이 있고,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한편은 도시부에서의 대중투쟁과 대중동원을 중시했고, 다른 한편은 여전히 그 어느 시기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게릴라전술에 의거한 지구전에 주안점을 두었다. 우리는 전자의 경향에 공명했다.

    후자의 조류는 위험한 것이었다. 이것은 때로「센데로 루미노소」〔남미 페루에서 일본대사관저 점거 등의 무장투쟁을 반복한 마오주의자의 그룹〕나 「크메르 루즈」〔캄보디아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 마오주의 그룹〕형의 활동을 상기시키게 한다. 그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99년 12월 31일에 있었던 「코르딜레라 인민해방군」(CPLA)〔루손 섬 중부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한 준군사조직〕전 사령관 콘라도 발웩의 암살이었다. 그는 성직자 출신이었다.

    이 살해는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피의 보복”으로, 발웩의 동생이 이끄는 신인민군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고 필리핀 공산당은 이를 용인했다. 발웩은 1980년대 초기의 신인민군의 분열과 새로운 조직의 결성에 공헌했는데, 이후 코르딜레라 인민해방군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 발웩 그룹은 사실상 군사적 활동을 포기하고 정치적 그룹으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해된 것이다. 발웩의 처형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과오였다. 이는 전형적인 센데로 루미노소 스타일의 보복이었다.

    이 무렵 혁명적 노동자당(RPM)이 에스트라다 정권과의 평화교섭을 개시했다. 사회주의노동당(SPP)은 정부와의 평화교섭은 중요한 문제이며, 한 단체나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운동 전체를 위한 것이므로 모든 혁명단체들 사이에 논의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교섭문제에 임하는 필리핀 공산당(CPP)에 대한 주요한 비판의 지점은 CPP의 자세가 혁명운동과 대중들의 요구라는 실질적인 쟁점에 부응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 있었다.

    그 약점은 교섭을 대중투쟁의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게릴라전의 연장이라고 보는 데 있었다. CPP는 평화교섭을 단지 시간을 벌기위한 책략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선거투쟁으로의 전환을 위한 방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교섭을 오로지 무장그룹과 정부 사이의 것만으로 국한시켜버린다. 농지개혁이나 고용창출, 행정에의 참가 등 대중들과 대중조직의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교섭을 통해 대중을 대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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