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으로 가는 길
    [유럽 통신-1] 희미한 선으로 보이는 거대한 철로
        2016년 07월 25일 12: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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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사스 일기>의 필자가 개인 일정으로 유럽으로 떠났다. 그래서 <텍사스 일기>를 잠시 쉬고 번외편으로 <유럽 통신>을 잠시 연재한다. 브렉시트와 터키의 실패한 쿠데타, 연이어 이어지는 테러와 이주민 문제 등으로 갈등과 고민이 깊어지는 유럽의 어떤 풍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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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여행을 떠난다. 먼 곳으로 오랫동안. 가방 안에 여행 안내서 제외하고는 딱 한 권만 넣었다.

    며칠 전 새로 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책장 어딘가에 80년대에 발행된 활판인쇄본 소설이 있을 게다. 그럼에도 굳이 새로 산 이유가 있다. 성서를 읽듯, 불경을 읽듯 이 소설을 통해 내 사춘기와 20대가 불꽃처럼 통과해온 70년대와 80년대를 묵상하고 싶어서다.

    때로는 유레일 기차 안에서 때로는 촉수 낮은 숙소의 불빛 아래서 천천히 천천히, 오늘의 세상을 만든 (어쩌면 더 생생히 현존하는) 어제의 모습을 되새김질하고 싶어서다.

    조세희

    그런데 조해일 선생이 전하시는 바에 따르면 조세희 선생이 아프시다 한다. 그것도 많이. 연작소설집 한 권과 <침묵의 뿌리> 사진집 한 권 외에는 작품이 없는 과작의 소설가. 글과 말보다는 행동으로 어두운 시대를 묵묵히 걸어낸 사람.

    그저 외경의 마음 외에는 얼굴 한번 뵌적도 없건만 그의 와병 소식에 갑자기 마음 한켠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럴리는 없지만 여행가방에 소설집 챙겨넣은 게 무슨 안 좋은 예고라도 된듯이.

    조세희 선생님. 큰 바위 같은 존재감으로, 형형한 눈빛으로 저희들을 지켜봐주십시오. 그래야 결기도 없고 용기도 없는 후배들이 힘을 냅니다. 부디 건강을 회복하십시오.

    대광야의 기차길

    아시아 동쪽 작은 땅 끝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또다른 땅 끝으로 간다. 이곳저곳 발로 걸으며 기차타고 다니며 산과 들과 사람의 마음을 가슴에 담아 오려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보스포러스니 우랄이니 모든 국경과 지명은 그저 인간이 금 그어놓은 작위일 뿐. 계절풍이 단숨에 대지를 쓰다듬으며 달리듯 유라시아는 그냥 하나의 대륙이다.

    인천에서 6시간 반을 날아 비행기는 우즈베키스탄에 잠시 기착한다. 살그머니 이름 불러보면 어쩐지 먼지바람 서걱이는 듯한 도시 타쉬켄트. 시골역 대합실 같은 공항에서 3시간을 머무르다 다시 런던으로 향한다.

    지금 창밖에는 끝없이 펼쳐진 중앙아시아 대광야.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하이얀 연두빛으로 타오르는 땅.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 보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철로가 있다!

    처음엔 가느다란 물줄기 하나 들판을 가로지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사람이 만든 길이다. 그 옛날 실크로드가 저러했을까. 황막한 대지를 뚫고 달려가는 저 아름다운 만곡선.

    오만불손 부딪히며 살아온 내 인생이 내려다 보니 저렇게 실낱 같은 목숨이었구나.

    웅웅대는 엔진소리 뿐 1만 미터 상공은 고요하다. 눈을 감으니 그 아래 까마득한 길을 거슬러, 내 마음은 몇 시간 전 떠나온 곳을 향해 자꾸만 달려간다.

    친구들, 여름 바람처럼 부디 건강하시기를.

    (p.s) 사진 중앙, 비행기 날개에서부터 가늘고 검은 선이 실처럼 이어진 게 보이나요? 저것이 중앙아시아 광야를 가로지르는 철도랍니다.

    비행기

    유럽 편지-1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몸살 감기에 속까지 안 좋아 사흘 동안 헤롱헤롱했습니다. 이제야 몸이 회복되어 글을 올립니다.

    오늘 낮 12시 5분 발 유로스타 타고 파리로 건너왔습니다. 그 즉시 저에 대한 입국 환영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습니다. 누구누구처럼 패션쇼하러 온 국빈도 아닌데. ^^

    파리북역에서 숙소로 오는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일당을 만나서 격투를….벌인 것은 아니고 3인조가 어깨를 마구 주무르면서 뒷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을… 점잖게 Don’t touch me 물리쳤습니다. 명색이 저도 유단자인데 한바탕 활극 벌이려다 참았습니다. ^^

    자그마하고 눈빛이 음흉한 아랍계 한 녀석(어깨를 주무른 바람잡이), 키가 190센티나 되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백인(키가 크니 팔도 길겠지요? 이 녀석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놈) 그리고 중키의 멀쩡하게 생긴 백인 이렇게 가지각색 세 녀석이 다인종 소매치기단을 구성했네요. 요 녀석들 저한테 실패를 한 후, 눈도 깜짝 않고 다시 정류장 주위를 배회하면서 다른 표적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 징한 놈들입니다. ^^

    파리는 10년 만에 다시 오는데 도시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때는 치안이 이렇게 개판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판단하기로는 같은 지하철 열차칸 안에 흑인 서너명으로 구성된 또다른 소매치기팀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여러 형태로 소란을 떨며 기회를 엿보다 중간에 우루루 내리더군요.

    제가 30분 만에 직접 본 것만 해도 이러니, 입국하는 관광객을 전문적으로 먹이감 삼는 이런 인간 하이에나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요. 거의 모든 여행책에서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바로 그대로입니다. 프랑스 오실 분들 참고 바랍니다(듣기로 스페인과 이태리는 더하다고 합니다만^^).

    샹젤리제에 밥을 먹으러 나왔습니다. 거의 삼사십 미터마다 구걸하는 거지들이 보입니다. 대부분이 사리를 두른 여인이고, 어떤 경우는 젖먹이까지 안고 있습니다. 복색이나 용모가 중동쪽에서 온 난민들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 또한 과거에는 못 보던 장면입니다.

    그 모습에 겹쳐 시내 곳곳에 전투복 입은 군인들이 소총 메고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대기차량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IS의 테러공격 여파로 보입니다. 종교적 극단주의가 불러온 동전의 양면입니다. 프랑스 오자마자 여러 가지로 착잡한 마음이 듭니다.

    런던에서도 그렇지만 파리도 마찬가지인 것이, 특징적인 건 주위에서 들리는 중국어가 압도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여름방학이라서 그렇겠지요. 대규모 학생 관광객들이 와글와글 만다린어로 떠드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청춘 남녀에 가족 여행객은 물론이구요. 지하철 1호선(M1) 루브르박물관 역에서는 불어 다음에 중국어 안내방송(그 다음엔 일본어, 한국어는 없음)이 나옵니다. 중국 본토로부터 쏟아져 나올 13억의 거대한 지구방랑이 앞으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절로 침이 꿀꺽 삼켜집니다.

    밥 먹고 맥주도 한 잔 걸쳤습니다. 그리고 바람 부는 저녁, 샹젤리제 대로 가 나무벤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소식 더 전하겠습니다

    유럽

    필자소개
    동명대 교수. 언론광고학. 저서로 ‘카피라이팅론’, ‘10명의 천재 카피라이터’, ‘미디어 사회(공저)’, ‘ 계획행동이론, 미디어와 수용자의 이해(공저)’, ‘여성 이야기주머니(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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