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키노 이후 시대와
    필리핀 공산당(CPP)의 분열
    [필리핀 좌파운동] 혁명의 주제와 전망을 둘러싼 고민들
        2016년 06월 23일 03: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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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장 1990년대 : 시대의 전환과 운동의 재평가

    1990년대는 20세기 최후의 10년이었고, 21세기 및 새로운 천년과 이어지는 시기였다. 이 10년 동안 지구를 흔든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1980년대 말에는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1991년에는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됐다. 이러한 것에 의해 소련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간의 냉전이 막을 내렸다.

    지정학상의 대변동이 일어나 바야흐로 초강대국은 한 개의 나라로 압축되었다. 세계를 말살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비축하고 예전의 식민지나 반식민지,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여 착취할 수 있는 경제력을 보유한 유일한 제국, 미합중국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변화는 오만한 자본주의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미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를 “역사의 종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본주의, 그리고 이른바 “리버럴”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대신할만한 시스템은 없다고 선언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1990년대는 자본주의적 “글로벌리제이션”의 도래를 예고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의미했다. 그것은 무역상의 모든 장벽의 제거를 초래했고 또 이용가능한 모든 자원 · 서비스의 민영화와 전 산업 규모의 규제완화를 의미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IMF와 세계은행, WTO라는 제국주의적인 국제기구가 처방하는 일련의 경제정책에 의해 추진되었다.

    세계화는 컴퓨터나 통신기술의 경이적인 진보에 의해 실현가능하게 되었다. 디지털 통신 시스템의 전자회로를 통해 눈 깜박할 사이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자본이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어, 자본주의, 제국주의 강대국에는 엄청난 호황을 가져다주었지만,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은 점점 더 낙오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리스트럭처링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거대 다국적기업이 추진한 글로벌한 자본주의적 구조조정과 함께 추진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컴퓨터 기술 진보의 산물임과 동시에, 1990년대에 심각화한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구조조정은 대량 조립·대량 생산방식으로부터 “플렉시블(유연)·린” 생산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는 종래의 대량생산방식 모델인 “포디즘”과 구별해 “도요타주의”로 불렸다. 구조조정에 의해 대공장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현장과 제조업 노동자의 비율이 현저하게 감소하고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의 노동현장으로 대체되었다.

    구조조정은 노동현장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아톰(원자)화”, 즉 생산에 있어서의 노동(및 노동자)의 세분화를 가져왔고, 이에 의해 “코어” 부분의 일을 하는 소수의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이른바 “주변적”인 일은 계약직이나 하청노동자들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업은 이것을 “노동의 유연화”라고 불렀으나 그것은 종신고용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전 지구상에서 파트타임이나 아르바이트 등 노동의 비정규직화나 계약직화가 풀타임의 정규노동에 비해 증가했다. 그로 의해 제수당의 삭감, 고용의 불안정화, 비조합원의 증가가 발생했다.

    공산주의체제의 붕괴와 글로벌리제이션 및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에 의해 노동운동은 후퇴를 강요받게 되었다. 자본가의 승리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동반했고, 1990년대를 통해 「세계화」의 이점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고용의 증대(라모스에 의하면 APEC이나 WTO에의 가입은 100만 명의 고용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관세 인하, 무역자유화, 상품시장의 개방, 최신기술의 자유화로 인한 생필품의 저렴화─ 이러한 선전이 노동자계급에 환상을 안겨주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행해졌다.

    자본주의의 위기

    이윽고 세계경제는 팽배한 과잉생산(상품을 사는 노동자계급이나 빈곤층의 구매력과 비교해서)과 팽창하는 채무, 투기로 인한 불안정, 막대한 무역수지의 불균형에 직면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 동아시아, 러시아, 브라질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일련의 위기가 발생했다.

    1990년대가 끝나갈 즈음,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분노가 폭발해 1999년 11월, WTO 각료회의에 항의하는 「시애틀 투쟁」이 전개되었다. 4만명이 넘는 반세계화 시위대가 회의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면서 WTO 각료회담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회의가 중지되기까지 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반세계화 운동의 발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기구에 대한 적대감의 증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1990년대의 필리핀

    정권 전복을 노린 잇단 쿠데타로 점철된 코리 아키노 정권의 어수선한 6년이 지나자 비교적 평온한 정치상황이 전개되었다.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피델 라모스 정권 하 필리핀 엘리트 지배층의 상대적 안정기가 도래했다.

    라모스는 마르코스 정권 시대에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코리 정권 하에서도 한동안 같은 포스트에 있다가 1988년에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라모스는 다른 대통령 후보 6명과 싸워 겨우 23.5%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것은 필리핀 대통령선거 사상 가장 낮은 득표율이었다. 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죠셉 에랍 에스트라다 상원의원으로 그는 이후 1998년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라모스는 군의 반란을 진정시키고 대통령 재임 중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한 것으로 신뢰를 얻었지만(이 때문에 일부 경제 기자들은 “믿음직한 에디”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1997년~98년의 아시아 경제위기로 인해 퇴임에 몰리게 된다.

    아키노와 라모스

    1987년의 코라손 아키노(왼쪽)와 피델 라모스(사진=필리핀 대통령 도서관)

    라모스의 유산

    라모스 정권의 출발도 모든 것이 순조롭고 장밋빛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2년에 라모스는 필리핀의 에너지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의회로부터 비상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에너지 문제라는 것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정전 문제였다.

    라모스는 비상권한을 행사해 입찰에 의하지 않고 “비밀 거래”로 독립발전사업자(IPPS)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구매전력협정(PPA)이라고 불린 IPPS로부터의 고정 구매시스템이 담겨져 있었고, 그로 인해 전기료가 놀랄 만큼 인상됐다. 소비자들은 IPPS 발전소가 공급하는 전기의 미사용분까지도 부담해야만 했다. 정전이 코리 시대의 유산이었다면, 우리가 전기요금을 지불할 때마다 경험하고 있는 구매전력협정에 의한 강탈은 라모스의 유산이었다.

    라모스 시대는 피플파워 혁명 후 가장 안정된 시대였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부정부패가 적었던 시대는 아니었다. 라모스 정권은 발족 당시부터 각종 오직(汚職) 의혹에 휩싸였다. 그중 하나로 국유토지청과 아마리사(社)의 거래를 들 수 있다. 이 거래는 마닐라만의 매립지 158헥타르를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사기업인 아마리사(社)에 매각한 사건이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이 토지는 아마리에게 19억 페소에 매각되었는데 평당 가격으로는 1,200페소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인근 토지의 자산가치는 평당 9만 페소로 거래되고 있었다.

    1998년에 행해진 상원의 조사에서는 국유토지청의 일부 간부들에게 17억 페소에 이르는 커미션이 흘러들어간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나왔다. 1996년 11월 29일, 에르네스토 마세다 상원의원은 이 거래를 “모든 사기의 원조”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또 한 가지 스캔들은 1998년 6월 12일의 필리핀 독립기념일에 맞춰 개최된 필리핀 박람회의 건설공사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앙헬스 시의 클라크 공군기지 터에서 개최된 총예산 35억 페소의 이 프로젝트에 들어간 건설비가 너무 비싸다는 비난이 일었다. 이 프로젝트는 라모스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젖줄”이었음과 동시에, 필리핀 정부에 있어서는 1998년의 국가예산의 1.7%에 해당하는 90억 페소를 쏟아 붓게 만든 “흰 코끼리”(애물단지)가 되었다.

    필리핀 공산당의 분열

    필리핀 좌파들에 있어 1990년대는 심각한 총괄의 시대인 동시에, 전략과 최우선 과제 및 방침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과 재평가의 시대였다. 또 일부에 있어서는 새로운 씨를 뿌리는 파종의 시대이기도 했다.

    1993년에 이러한 모든 사정들이 필리핀 최대의 좌익조직인 필리핀 공산당을 분열로 이끌었다. 이 분열에 의해 당은 마오주의의 교리를(필리핀 공산당 의장 호세 마리아 시손의 논문 「우리의 기본원칙의 재확인과 오류의 수정」에 규정된 대로) 재확인하는 “재확인파”와 이를 거부하는 “거부파”로 양분되었다.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1993년 6월 10일에 필리핀 공산당으로부터 분열해 나온 최초의 조직이 되었다. 1993년 후반에는 다른 지방조직과 전국 서기국도 필리핀 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중에는 필리핀 공산당 비자야 제도(諸島)지방위원회(네그로스, 파나이, 중앙 비자야제도, 중앙 민다나오, 서 민다나오), 전국농민부 서기국, 그리고 전국통일전선위원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이 필리핀 공산당과 신인민군으로부터 분열한 것을 알리는 최초의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몇 명의 미디어 관계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어느 날 아침, 몇몇 TV와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들과 만나 미리 렌트해 둔 봉고차를 탔다. 보위를 위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삐삐(당시 아직 휴대폰은 없었다)의 스위치를 끄고 나에게 맡겨둘 것을 요구했다.

    봉고차는 칼루칸까지 가서 라 로마 묘지로 들어갔다. 기자회견은 여기서 열릴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묘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동지는 출입구 쪽 담장 구멍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 부근에는 이웃끼리 처마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밀집해 있었고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집안일을 하거나 모여서 잡담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들 대부분은 하던 것을 멈추고 미디어 관계자가 TV카메라나 방송기재를 옮기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골목에서 큰 길로 나오자 거기에는 다시 두 대의 봉고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포포이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캡인 세르지오 로메로가 기다리는 장소까지는 거기서부터도 한참을 가야했다. 두 사람은 야구 모자를 쓴 채 인터뷰 중에 얼굴을 찍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다. 인터뷰에서 포포이는 카를로스 포르테라는 가명을 썼고,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이 필리핀 공산당으로부터 분열한다는 성명문을 읽었다. 그날 밤, 몇 개의 TV채널에 회견 영상이 흘렀고 다음 날 신문이 분열을 보도했다.

    KMU(5월1일 운동)의 분열

    분열은 대중조직에도 파급됐다. 수도권지역의 「바얀」 지부가 전국 바얀으로부터 분열을 선언했고, 광범위한 민주연합체인 「산라카스」와, 사회주의 조직인 「마카바얀」의 두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1993년 8월, KMU(5월1일 운동) 수도권지역의 조직들이 KMU로부터의 분열을 선언했다. 2~3주 전에 KMU 중앙은 분열의 조짐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재조직해 KMU 마닐라수도권지부를 재건하려 했다.

    이 새로운 KMU 중앙의 지부 결성을 위한 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분열파의 리오디 구즈만〔BMP의 현의장〕이 이끄는 조합 간부와 100여명의 지지자가 몰려가 연단을 점거하고 회의의 무효를 선언했다. KMU 중앙이 회의장을 만달용의 레스토랑 「구룡(九龍)」으로 옮기자 리오디 그룹은 거기까지 쫓아가 회의장 진입을 시도했다. KMU 중앙측 간부들이 스크럼을 짜 리오디 그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리오디가 돌파하려 하자 한 명이 그의 가슴을 발로 찼다. 이를 계기로 난투극이 벌어져 레스트랑의 유리가 깨지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결국 회의는 개최되지 못했다.

    리오디에 의하면, 그 후 KMU 중앙에 의한 마닐라수도권 지부 결성 기도는 마닐라시의 한 개 지부를 제외하고 분열을 선언한 마닐라수도권 지부에 의해 모두 분쇄됐다. 1993년 9월, KMU 마닐라수도권 지부는 약 5,000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BMP」(필리핀 노동자연대)로 명칭을 변경했다.

    제24장 당의 재건과 운동의 쇄신

    필리핀 공산당으로부터 분열한 “거부파”를 한데 모으려는 시도는 1994년에 좌초했다. 그 과정 속에 상호비난이 난무했다. 거부파를 또 다시 분열로 이끈 이유를 하나로 특정 짓기는 어렵다.

    거부파 내에 다시 두 개의 입장이 생겨, 그것이 다른 두 개의 그룹으로 발전해갔다. 한 쪽은 거부파 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및 그 계열 조직으로 “제2세력”으로 불렸다. 다른 한쪽인 “제3세력”은 거부파 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의 방침에 비판적인 그룹이었다. 대중운동 레벨에서도 이 분열을 반영한 두 개의 새로운 조직이 생겼다. 마닐라 · 리잘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적, 사회주의적 세력의 폭넓은 연합인 「산라카스」와 “제3세력”의 연합체 「시글라야」였다.

    1995년 9월, 6개 지역의 구 필리핀 공산당 지역위원회 거부파의 지도부ㅡ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비자야 지방의 4개 지역위원회(네그로스, 파나이, 사마르, 세부), 그리고 민다나오의 제1지역위원회(센트럴 민다나오 지방위원회)ㅡ가 “반대파 서미트”를 개최했다. 그들은 혁명적 노동자당(RPM)이라는 하나의 당으로 재결집할 것을 결정했다. 서미트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에 의한 왜곡에 대항해 맑스 레닌주의의 기본노선을 견지할 것을 확인했다. 또한 신당 결성대회의 준비를 주요한 임무로 하는 임시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RPM의 결성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센트럴 민다나오 지역위원회가 RPM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 민다나오의 공산당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인민공산당」이라는 독자적인 당을 만들기로 하고 “주비위”를 결성했다. 1996년에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포포이 지도하의 그룹과 “블록”(Bloke)이라고 자칭한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그 여파로 임시지도부가 붕괴되고 말았다. 얼마 동안 「블록」은 혁명적 노동자당(RPM)에 남아 있었지만 1998년에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그 후 RPM에 남은 사람들도 다시 3개 내지 4개의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반대파 서미트 개최 수개월 전, 거부파의 일부가 새로운 혁명적 조직을 창설하기 위해 독자적 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필리핀 공산당의 전(前)스탭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마닐라수도권에 있는 여러 NGO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리핀 공산당이나 마닐라 · 리잘 위원회 세력과는 달리 혁명으로 가는 “제3의 길”을 주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3세력”으로 불렸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전술적 · 조직적 차이로 인해 이 회의도 와해되고 말았다.

    포스트 독재시기

    경제적 · 정치적 상황은 마르코스 정권의 후반에 비해 개선되었으나, 그것은 지배계급이 체제의 와해 속도를 늦추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배계급은 경제가 거의 전면적으로 붕괴에 이르고, 정치상황이 혁명에 근접했던 마르코스 시대의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반동국가는 법치국가로 옷을 갈아입고 계엄령 이전의 여러 부르주아 기관들(그 필두는 상원과 하원의 국회였다)이 다시 등장했다. 지배계급 내 여러 파벌의 항쟁은 이제 선거를 통해 비교적 부드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도 정치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필리핀은 이 지역의 새로운 공업국(NICS)이 되고 있다고 피델 라모스 대통령이 아무리 선전해도 필리핀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연속된 피플파워 정권(코리와 라모스)은 독재자 마르코스가 손대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했다. 반면 그들은 마르코스 치하에 만연했던 “정실(패거리) 자본주의”의 해체조차 하지 못했다.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패거리”들은 엣사 정권으로 말을 갈아타는 것에 의해 자신의 자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부르주아 정치제도는 여전히 동요하고 있었다. 지배계급 중의 다양한 파벌들이 점점 줄어드는 국가의 자산으로부터 최대한의 전리품을 손에 넣으려 기를 썼다. 지배계급 전체의 폭넓은 이익을 대표하도록 만들어진 부르주아 제도는, 자파에 의한 배타적 지배를 도모하는 파벌간의 항쟁에 의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혁명적 정세의 징후가 나타날 정도로 지배계급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르코스 독재 말기에 나타난 상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혁명의 전망

    혁명세력은 혁명적 정세의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 새로운 상황(파업이 에스컬레이트되지도 않고, 농민봉기도 없고 자연발생적인 저항운동도 일어나지 않는)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리핀에 있어서의 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ㅡ어떤 나라에서 언제 혁명적인 상황이 갑자기 발생하는가, 또는 “아직 잠들어 있는 광범위한 대중을 눈뜨게 하고 투쟁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에 대해 그 누구도 미리 말할 수는 없다(『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좌익소아병』).

    요컨대 필리핀에 있어서는 혁명의 객관적인 필요성이 아직 존재하고 있고, 그 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이것은 독재체제의 붕괴만으로는 실현되지 못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현재의 시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독재체제로부터 리버럴한 부르주아 지배체제로의 이행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제국주의 세력과 엘리트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제적 · 정치적 강령을 내건 부르주아 국가를 상대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코리 헌법ㅡ마르코스 독재체제 붕괴 후 공포된ㅡ은 독재체제의 부활을 저지하고 광범위한 민주주의의 장을 제공하도록 입안된 리버럴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속된 피플파워 정권에는 헌법의 민족주의적 · 민주주의적 조항을 실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코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헌법에 반해 1992년에 미군기지를 존속시키려는 캠페인을 행했다. 대중운동의 힘에 눌린 상원이 헌법의 정신을 지켜 기지 반대의 결정을 내린 덕분에 코리의 책동은 저지될 수 있었다.

    코리가 내놓은 정권의 대표적 상품이었던 농지개혁조차 코리 일족의 하시엔다 루이시타 농장〔루손 섬 중앙의 타를락 주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6,435헥타르의 면적을 보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필리핀 의회를 지배하는 지주세력은 필리핀에서 보다 강력한 토지개혁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차례차례 주저앉히는 데 성공했다.

    후진 자본주의사회

    필리핀 사회는 생산양식에 있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전환을 완료하지 못했다. 필리핀 사회는 아직까지 후진적이고 미발달한 자본주의 사회로, 낡은 제도의 흔적(지주제도, 차지제도, 고리대금업, 후진적 농업 등)이 남아 있어 외국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극소수의 제조업과 필리핀의 많은 섬들에 산재되어 있는 소규모의 가내공업, 그리고 상인, “브로커”가 경영하는 영세한 “서비스업”들과 혼재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리핀 경제가 제국주의의 지배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불충분하고 왜곡되어 있다. 대부분의 자원이 채권자인 외국의 독점 자본이나 IMF, 세계은행에 대한 방대한 채무의 변제로 흘러들어가 필리핀을 경제적으로 “이륙”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다국적기업은 그들 사업 중 가장 노동집약적인 부분만을 필리핀에 흘려놓아 이 나라가 전면적으로 공업화하는 길을 막고 있다. 다국적기업은 싼 노동력과 천연자원을 수탈하는 한편, 필리핀을 사실상 잉여생산물의 해외 처리장으로 활용해 왔던 것이다.

    한편 국내 부르주아는 대부분이 지주들로, 그들은 축적한 자본의 일부를 상업(주로 브로커업), 고리대금업, 토지 구입, 부동산투기에 투자하고 있다. “산업” 부문의 엘리트층은 자신의 대농장을 근대화한 사람들로 주로 상업 · 서비스 부문에서 사업을 일으켜 해외투자가들과의 합병사업에 주력했다(그 일부에는 자금을 해외로 투자하고 있는 자도 있다).

    필리핀의 후진성과 미발달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전근대적 자본주의적인 수탈과 착취의 혼합에 의해 초래된 사회 · 경제 구조의 결과이다. 즉 필리핀은 혁명의 일반적 민주주의적 과제와 함께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 반(反)반(半)봉건주의의 과제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이러한 과제에 천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리핀 혁명은 분명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주도권이 부르주아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의 부르주아는 필리핀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전환을 완수할 수 없다. 또한 필리핀의 전면적 근대화, 전면적 산업화를 주도할 수도 없다.

    다른 한편, 필리핀의 어느 정도 산업화된 자본주의사회로의 전환은 신흥공업국과 마찬가지로, 예를 들면, 지주 엘리트층이 이전부터의 소작관계를 통해 수탈한 잉여자금으로 스스로 상공업 부르주아로 전환하는 형태를 취해 과거의 억압적인 관계의 특징을 어느 정도 남겨놓은 완만하고 일그러진 발전과정을 밟으며 이루어지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레닌이 말하는 이러한 근대화의 “고통을 동반한 과정”은, 농촌공동체의 해체(농지가 재분할되고 공업용지로 전화되는 것)가 그 특징으로, 토지를 가지지 못한 빈농의 대규모 축출과 도시부로의 인구 유입, 그리고 그로 인한 도시빈민의 획기적인 증가를 만들어낸다. (신흥공업국의 경우는 이러한 전환이 포괄적인 토지개혁의 실시에 의해 극히 단시간에 행해져, 강력한 국내시장이 만들어졌다. 이 전환은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의 정치적 판단에 유래하는 측면이 크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전환이 어정쩡한 해결로 갈 것인가, 혹은 보다 철저하게 급속한 “비교적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즉 경제적 자원을 인구의 대다수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혁명을 통해)일어날 것인가는 노동자계급, 도시 프티부르주아, 대량의 빈농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세력의 혁명수행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그러나 농민들이 다양한 계급으로 분열하여 그 대부분이 농촌 프로레타리아나 도시노동자 예비군으로 전화해 가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부르주아에게 그 주도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아니 부르주아를 투쟁에 끌어들이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다. 이른바 민족 부르주아의 진화가 진행되면서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세력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위탁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 부르주아는 점점 더 혼란에 빠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외국자본에 종속되게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야나 부문(공업, 농업, 비공식노동자, 도시빈민)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에 있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실현하고 완수하는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은 이 투쟁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그들은 그 투쟁을 사회주의를 향한 연속적인 투쟁으로 전화시키던가 그렇지 않으면 후진자본주의 틀 내에서의 개량을 추구하는 장기간에 걸친 모호한 투쟁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기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객관적인 필요성은 존재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정치적 공세를 내걸고 대중들을 혁명으로 이끄는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인 결의라고 확신한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전위로, 전위는 민주주의 단계에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폐절로,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건설까지 영속적인 혁명을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전진의 전망

    혁명투쟁의 본질은 피플파워 혁명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필리핀 좌익이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피플파워 혁명 후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공간의 확대에 의해 좌파 진영에 부여된 기회이다. 1986년의 독재정권 타도를 통해 쟁취한 민주주의의 공간은 대단히 유의미한 것으로, 혁명운동세력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견해나 정치방침을 선전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운동은 분열되었고, 확실히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혁명적 임무를 받아 안을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 자각을 하고 있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운동의 전개 역시 지지부진해 필리핀 지배계급의 단결보다도 더 뒤지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지금까지의 반독재 의식으로부터 그다지 나아가고 있지 못했다. 반독재 투쟁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파업이나 대중행동의 감소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은 오히려 쇠퇴하고 있다. 게다가 사회주의 세력의 사기는 구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패배에 의해 더욱 저하되고 있다.

    노동자계급 운동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취약했기 때문에 필리핀 부르주아들은 스스로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강화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들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자의 이데올로기 공세(자본주의의 승리,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늘날의 지배계급은 마르코스 독재체제 시대와 비교해 보다 안정적이며 통일되어 있다. 마르코스 시대에는 부르주아의 지배형태는 심하게 동요했고 서로 상쟁하는 제정파로 분열되어 “중간계급” 자체가 급진화되고 있었다.

    필리핀 계급투쟁의 느슨해진 템포 하에서 좌익 조직이 대오를 통일시키는 길을 찾아내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좌파의 단결은 지금까지 서술해왔듯이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차이로 인해 방해받아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결이 자기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전위의 형성에는 진영 내의 개량주의나 우파, 극좌적 조류와의 투쟁이 필요하다. 이것은 1960년대 후반의 구 필리핀 공산당 내 청년층의 분열이나, 1993년의 필리핀 공산당 내의 분열에서 얻어진 교훈이다. (후자의 분열이 필리핀 좌익의 가일층의 세분화나 분열을 초래했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종래의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직적으로 결별하는 것 없이 혁명운동의 재생은 불가능하다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투쟁하는 당의 건설

    낡은 당의 견해나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통일당을 건설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체제가 위기를 향해 또다시 쇠퇴해가는 가운데 당 건설 프로세스는 사회계층의 새로운 양극 분해에 의해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위당을 부활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해 당이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 대중을 정치공세로 이끌어 당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권력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을 통해 정치권력을 쟁취하는─그야말로 이것을 가능케하는 수단이 전위당이라고 하는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은 유지되어야만 한다.

    전위당은 노동자계급의 투쟁, 일반적으로는 대중 투쟁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대중운동의 이익과 동떨어져 있다거나, 나아가 그 이익과 충돌하거나 하는 조직이어서는 안 된다. 전위당은 노동자계급의 선두에 서는 당이 되어야만 하며, 거드름피우며 외부로부터 지도하는 듯한, 운동의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좌파 그룹과 협력하여 활동하는 것이 투쟁하는 당의 건설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당 건설에는 전국 레벨의 실천적 중앙지도부와 함께, 확실히 정비되고 훈련된 하부조직의 형성이 불가결하다. 그것은 전 당원의 일치된 행동과 내부의 참여민주주의를 결합시킨 조직이다(스탈린주의자에 의해 비속화된 레닌의 민주집중제의 본래의 내용은 이러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명확한 태도를 취할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의 프로세스와 방법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당의 건설은 사회주의 세력이 이데올로기적 ·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철저하게 토론하고, 강령에 있어서의 일정 수준의 통일을 달성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체제와 싸우는 노동자계급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전략적·전술적 방침을 짜내는 것에 의해 사회주의 세력은 지금부터 이 프로세스의 시동을 걸 수 있다. 그것은 일련의(당면하는, 또는 과도적인) 요구라는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이 요구야말로 모든 민주주의 세력을 단결시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지키고 향상시키고, 또 그것을 통해 미래의 사회주의적 투쟁으로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선전이나 투쟁을 통해 통일을 위한 폭넓은 전략적 기반을 제안함에 의해 사회주의 세력은 스스로의 대오 중에서 선거에만 집착하거나 개량적인 강령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솎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적인 레벨에서 가일층의 통일이 달성되는 것은 이러한 전략적 문제를 통해서이다.

    최종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투쟁이 모든 전선에서 발전하는 것과 최대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다. 필리핀 좌파가 현대의 제반 문제에 맞서도록 재활성화하는 길은 사회주의 세력의 통합에 의해 비로소 열릴 것이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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