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평범한’ 일생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 한 친일파의 인생과 '사적 욕망'
    2016년 06월 20일 09: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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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식민지시기 활동한 김윤정(1869~1949)이라는 인물이 있다. 오늘날 역사서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실제 이 사람의 행적을 보면 크게 주목할 만한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8.15 이후 한국 정부 수립 때까지 살았던 이 사람의 행적은 이 시기 새롭게 성장하여 ‘사회 지도층’의 반열에 오른 어떤 삶의 전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1897년 관비 유학생으로 도미한 김윤정은 1903년 워싱턴의 콜로우드대학을 졸업하고 주미 공사관 서기생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도미 유학 이전까지의 행적이나 선대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지체 높은’ 집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른 가까운 나이에 과감하게 미국 유학을 선택한 데에서도 이런 측면을 약간 느낄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 앞길을 개척해 보리라.

그런데 외교관으로 나름대로 승승장구하여 1905년 주미 대리 공사를 맡고 있던 김윤정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전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을사조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각지의 한국 공사관에 공관을 폐쇄하고 업무를 일본 공사관에 인계한 후 신속히 귀국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훈령을 받은 외교관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상당수는 쉽게 공관을 폐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짐작하건대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지만 국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관리의 신분이었고, 또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주 프랑스․벨기에 공사를 겸임하고 있던 민영찬 같은 사람은 조약 체결 직후 한 달여 동안 프랑스는 물론 러시아, 미국 등지를 오가며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항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잠시 망명을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도 결국 귀국하여 이후 일제에 순응하는 여생을 보내기는 했다.)

그런데 김윤정은 이 순간의 국면에서 남 다른 면모를 보였다. 누구보다 먼저 공사관을 폐쇄하고 귀국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의 ‘협조적 태도’는 일본 측도 인정하는 바였다. 당시 주미 일본공사였던 다카히라가 김윤정을 일본영사관 직원으로 채용해도 좋겠다는 서신을 본국 정부에 보낸 데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06년 2월 귀국한 김윤정은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한 ‘공로’로 통감부 시기, 그리고 병합 이후 관료 생활을 이어가 1925년에는 충청북도지사까지 올랐다. 총독부 국장과 같은 핵심 포스트에는 한국인을 발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지사는 실질적으로 한국인이 식민지 관리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1년여의 도지사 근무를 마친 김윤정은 퇴관후 8.15 때까지 20여년간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여생을 보냈다. 아마 더도 덜도 아닌 안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김-윤

김윤정(왼쪽)과 윤치호(사진=위키피디아)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윤치호 일기>이다. 식민지시기 기독교계의 대부이면서 ‘거물 친일파’였던 윤치호는 수십년간 영문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32년 5월 27일자를 보면 이런 풍경이 나온다.

1932년 5월 27일 금요일, 맑음
서울 집. 저녁 7시에 이케다 경무국장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화월루로 갔다. 쉴 새 없는 술, 게이샤의 춤, 맛보다 외양에 더 신경을 쓴 요리들. (중략) 11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김윤정, 장헌식, 이항구 등은 누구보다도 이 저녁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호탕하게 웃었다. 김윤정은 찬송가까지 부르며 이런 연회야말로 정말로 ‘진정한 천국’(원문은 ‘veritable Kingdom of Heaven’)이라고 말했다. (장헌식도 식민지시기 도지사를 역임한 관리 출신이며, 이항구는 이완용의 차남이다.-필자)

너무나 평화롭지 아니한가? 김윤정의 충만한 즐거움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8.15의 날이 왔을 때 그는 이미 70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인 이 노인은 이듬해 다소 놀랍게도 다시 한 번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29일자 기사이다.

노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괘씸한 친일 노구의 최후의 발악 – 시내 필운정(현재 종로구 필운동) 사는 김윤정(78)은 소위 한일합병 당시 화성돈(위싱턴) 주미대리공사로 있다 일본 주미공사 히오키에게 조선공사관을 접수시킨 다음 출신교인 ‘껄레데토’ 대학 총장의 소개로 이토오(이토오 히로부미를 가리킴)의 등용 추천장을 얻어 조선에 돌아와 태인군수로부터 인천부윤을 거쳐 충북지사,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종3위, 훈2등의 꼬리표가 붙기까지 왜정에 바친 충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인데 미군이 진주한 후 하-지 중장에게 ‘자기는 친일파도 반역자도 아니니 등용해달라’는 진정을 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시 이승만 박사, 김구 총리, 김규식 박사에게 대리공사증서, 이토오의 추천장 등의 영문 번역을 첨부하여 같은 진정서를 제출했다가 역시 추출을 당하면서도 누차 오만하게도 전화로 회답을 독촉하는 등 면회를 강요하여 27일 제1관구 경찰청에 면회강요죄로 취조를 받게 되었다.

이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꽤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집요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고 해야 할지 맹목적이라고 할지. 이 광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적당할까. 상상해 보자. 돋보기를 쓰고 침침한 눈을 비비며 “하-지 중장”에게 “등용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쓰고 있는, 50여년 전 부푼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너가 배운 영어 실력을 발휘하여 진정서에 첨부할 서류를 번역하고 있는 여든이 다 된 어느 노인의 모습을.

김윤정의 일생은 과연 특별한 것일까? 반대라고 생각한다. 사적 욕망의 끝없는 추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평범’한 게 아닐까? 이런 삶이 한, 둘이었을까? 사실 김윤정을 ‘친일파’ 혹은 ‘민족 반역자’로 성토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를 성토하는 것으로는 수많은 ‘김윤정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구조와 과정을 전혀 해명할 수 없다. 우리가 정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평범함’의 제일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이다. 무엇이 있기에 이런 삶은 오늘날까지도 반복해서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 아닐지.

필자소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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